놀자, 책이랑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 이윤학 산문집

칠부능선 2022. 7. 14. 23:45

 

이윤학 시인은 오래 전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로 만났다.

페북에서 신간 소개를 보고 주문했다. <초판 2022.7.7> 

천생 시인인 그의 시 밖의 삶에 맘이 착 가라앉는다. 왜 이리 짠한가. 

 

 

 

- 작가의 말

 

 한 사내가 떠난 외동 빌라의 끝 층

 픽스창,

 무수한 내륙등대 불빛이 모여 있었다

 

 지붕 밑 외벽에 둥지를 튼 제비

 한 쌍이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둥지 밑 폐 전화선에 앉아

 서로 거리를 벌리다 좁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앉기를

 반복한 끝에 날이 새고 있었다

 

 오늘은 은둔형 외통이 사내가 떠난

 빈집에 들어가 십 년을 살고 나왔다

 책 한 권 들고 어둑해진 골목길

 어깨 높이 화단 턱에 걸터앉았다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곁에 앉아

 언제가 불쑥 부르고픈 노래가 있었다

 

 

 

*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위해 간절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샘물은 차오르면서 불순물을 걸러낼 수 없어. 천천히 불순물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어느새 맑아진 물을 샘 밖으로 흘러보내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납작 엎드려 샘물을 입안 가득 담았다. 그동안 많은 걸 물어뜯어 부실해진 치아 뿌리가 쑤셨다.식겁한 나는 옹달샘 곁에 입을 버리고 벌렁 누워 더운 바람을 들였다. 돌팔이 의사에게 아픈 이를 뽑으러 가는 남자아이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자꾸 돌아보았다. (26쪽)

 

* 41년간 빨대를 꽂고 마신 술을 딱 끊고 반년간 끙끙 앓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잠 귀신에게 끌려가 반년간 엄살을 피웠다. 어머니가 물 적신 가제수건을 가져와 땀을 닦아주다 말고, 징글맞게 오래된 비단 보자기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처녀 때 웃음을 보여주었다.  (41쪽)

 

* 농사일하기 싫어 다락방에 올라간 나는 세로줄 니체 전집을 읽었다. 말을 하는 대신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농부의 삶이었다. 진정한 농부의 삶이 니체의 삶과 비교해 못할 것도 없었다. 체험을 통해 행동하는 농부의 삶은 자신으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의지는 정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씨앗이 품고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 또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44쪽)

 

* 자정 무렵에 귀가한 나는 목재계단 앞에서 구두를 벗어들고 있었다. 구둣발로 계단을 밟으면 지붕까지 진동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되도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지 않았다. 삐거덕거림이 참새들의 둥지 짓는 일과 부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어미가 먹이를 물어오면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새끼들이 입 벌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물에 말은 밥을 바닥에서 떠먹으며 어머니처럼 과거와 현재를 끈으로 잇고 싶었다.  (163쪽)

 

* 내 아이들은 어느새 다 컸고 찾아갈 처가도 남지 않았다. 이혼해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 엄마와 한참 전에 협의이혼을 하였다. 조종 기간 안에 구청에 서류를 접수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잘해준 적이 별로 없어 웃게 해줄 일을 같이 만들고 싶었지만, 물건너갔다. 전 재산인 한옥을 넘겨주고 옷가지를 챙겨 나와 원룸을 전전했다. .... 그래서 혼자 있을 때 가끔 울고 싶고, 나도 모르는 새 흐르는 눈물을 그냥 냅두게 되었다.  (189쪽)

 

* 전등과 전축이 전부인 작업실에 들어오니 제법 자세가 집힌 모양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TV에서 벗어나니 무인도에 도착해 간신히 움막을 짓고 들어앉은 느낌이다. 노트와 연필과 연필깎이만 남은 책상에 앉는다. 더디고 불편하더라도 당분간은 노트에 연필로 글을 써볼 생각이다. 

  봄이 오면 화분의 남천 가지에 새순이 돋아날 것이다. 땅이 풀리면 작업실 근처 냇가에 남천을 옮겨 심을 것이다. 스스로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지켜볼 것이다. (2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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