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저만치 혼자서 / 김훈

칠부능선 2022. 7. 9. 04:35

  지난 토욜 서행구간에서 사온 책이다. 발행 2주만에 2쇄를 찍은 걸 보니 역시 많이 팔리고 있다.

  <강산무진> 이후 16년만의 단편소설집이고 보니 산문 쓰던 습인지 끝에 '군말'이 붙었다. 김훈이 이리 친절해진건가. 나는 '군말'이 좋다.

  지난 번 이상문학상 수상, 우수상 젊은 작가들의 소설보다 단방에 다가온다.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 군말

 <명태와 고래>

   2010년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이영조)는 광복 이후 전쟁과 분단, 개발독재와 군부독재, 유신과 쿠데타의 시대를 거치면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 인권침해의 사례를 조사한 결과를 '종합보고서'로 발간했다.

... 이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는 범죄는 모두가 군대나 경찰 그리고 검찰과 법원에 의해 자행된 국가 범죄였다. 기소와 재판과 선고의 사법절차를 모두 거친 합법적 학살도 많았다. ...

 < 명태와 고래>는 이 보고서를 읽은 후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쓴 글이다. 나는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251쪽)

 

   <48GOP>는 십 년쯤 전에 언론사 취재팀과 함께 전방 군부대를 취재 여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소설로 쓴 것이다. ...

 전쟁과 분단의 기원은 나의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 속에서 그 필연성들이 배태되고 자라나서 오늘의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

  내가 1948년생이므로 소설 제목을 '1948GOP'라고 정했다. 괴로운 제목이지만 바꿀 수도 없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던 1910년생이고 그 아들인 나는 그 나라를 다시 세우던 1948년생이다. 1948년은 1910년의 연장 위에 있다.1910, 1948, 이 두 개의 숫자가 부자의 생애에 좌표처럼 찍혀 있다.

 (254쪽)

 

  <저만치 혼자서>는 2012년 10월 23일 자고한 천주교 사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생애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양종인 신부는 내가 육군에 복무하던 1972년에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페결핵으로 아팠으나 성직으로 부르는 목소리를 감득하고 있었다. 양종인은 20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양신부와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양신부의 누나인 양선희 기자가 2012년 11월 9일자에 중앙일보에 쓴 칼럼을 읽고 이 젋은 신부가 세상에 다녀간 것을 알았다.   

  그후에 나는 양신부의 친구인 김영훈군을 통해서 양신부의 생애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257쪽)

 

 

 

 대장 내시경 검사

*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켜간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때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나은희의 온도를 사랑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나은희 쪽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30쪽)

 

* ... 결혼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신랑 신부가 안정된 수입의 바탕을 확보하는 일에 힘쓰기 바란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 

  라고 말했다. 하객들 중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월롱동은 '물적 토대'는 먹고 살 만큼은 이루었으나, 날마다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일을 지속시킬 만한 '연민의 힘'을 길러내지는 못했다.  (141쪽) 

 

 

영자

*  저녁 여섯시 무렵에 노량진에서 시간은 시들었다. 시간은 매말라서 푸석거렸고 반죽되지 않은 가루고 흩어졌다. 저녁이 흐르고 또 익어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말라죽은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 저녁 여섯시 무렵에는 시장기가 몸속에 번졌다. 저녁마다 시장하기는 했는데, 지나간 시장기는 기억 바닥에 매몰되어서 모든 시장기는 처음이었다. 몸이 시장하면 어둠의 가루들 속에 허기가 번져서 눈앞이 시장했다. (161쪽)

 

 

저만치 혼자서

*  신자들은 고해 때마다 다들 똑같은 죄를 고백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저절로 빚어지는구나. 장분도 신부는 그런 혼란에 빠졌다. 죄라기보다는 생활이였으므로, 어떤 신자들은 금지된 뻘에서 바지락을 캔 일은 고백하지 않았다. ...

- 신부님, 아주 오래전 것도 말해도 되나요?

- 그럼요. 죄는 오래됐다고 해서묽어지지 않습니다.

- 처녓적 것두요?

- 너무 억지로 끄집어내지는 마십시오.

(233쪽)

 

- 김루시아 수녀님의 빨래를 수거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뜼일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고백하는 것도 죄의 사함을 받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로 수녀님의 결벽과 수줍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