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 / 배혜경

칠부능선 2021. 12. 24. 15:44

 

배혜경 작가는 일면식 없는데 벌써 네 번째 책을 읽는다. 

첫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탄탄한 지식과 적당한 감성이 잘 어우러져 가독력이 좋다. 거듭 읽을 것 같다. 박수보낸다. 

영화는 가성비 높은 종합예술이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즐길 수 있으니 감사, 감사할 장르다. 대중화의 기술 발전은 이렇게 인류에 이바지한다. 

'수필가 배혜경이 영화와 함께한 금쪽같은 시간'의 결실이다.

내가 본 영화보다 못 본 영화가 많지만, 저항없이 그의 안내에 따라간다. '긴 프롤로그'부터 '짧은 에필로그'까지.

좋은 영화를 많이 소개받은 듯, 든든하다.

가족이야기가 살짝 어우러저 정감 있다. 쿨한 듯 이야기하지만 속살이 촉촉하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극장에 몇 번 못 갔다.

관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적막한 영화관에서 괜스리 근엄모드에 빠졌었다.  

친구와 함께 자유롭게 콜라와 팝콘을 끼고 화면에 빠져들 날이 어서 오기를.

내 '금쪽같은' 시간은 어디쯤일까를 생각했다. 실은 많이 지나갔지만, 난 또 '지금, 오늘' 이라고 우긴다.

 

 

* 박찬욱 감독의 <파주>는 홍보수단으로 내세운 파란의 사랑이니 형부와 처제의 금단의 사랑이니 하는 광고문구가 영화의 속내를 무척 흐려 놓았다. 오리무중인 게 사람의 속내이듯 영화는 안개로 시작해 안개로 끝나며 도무지 인물들의 속을 당장은 알기 어렵게 툭툭 던져 놓는다. 잦은 플래시백으로 그들 속내만큼이나 뒤죽박죽 시간적 배열이 엉켜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66쪽)

 

* 작고 깨끗한 나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기이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류블라니차강을 따라 푸줏간 다리와 용의 다리를 지나는 마을 입구였는데 남자들이 나무 아래 모여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고 그 위로 <빅 피쉬> 속 죽은 자들의 마을 입구에 걸린 것처럼 신발이 한 줄로 높이 매달려 있었다. 여러 모양 여러 크기의 신발이었다. 해거름에 숙소를 나와 산책을 나선 조용한 마을에서 불현듯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와 있는 건지 모를 편안하고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95쪽)

 

* 당시 에세이 합평을 매달 했다. 동의되지 않아도 막내라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던 수술칼에 둔하게 베이고 말았다. 날카롭게 잘 벼린 칼이었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라따뚜이>는 비평의 몫에 대한 발언에 동감되는 점이 있어 나를 다독일 수 있었던 의외의 애니메이션이다.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비평가critic와 평자revlewer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 '라따뚜이'라는 음식에 대한 글을 평자가 쓴다면 미학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비평가의 글보다 훨씬 부드럽고 쉽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 라따뚜이를 먹어 볼 미래의 손님들에게 이 음식을 소개하면 되는 것이다.  (154쪽)

 

* 그 모든 과정을 의연하게 이겨 내고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엄마는 항암 치료를 하고 병원에서 나와 한아름 국화꽃을 양동이째 사서 내게 안겨 주었다. 엄마가 마음을 표시하는 방식은 어릴 때부터도 그랬던 것 같다. 현실감각에 발빠른 다른 엄마들과는 달랐다. 세상 욕심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순진한 방식이랄까. 터무니없이 시뻘건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긴 세  가지 색 싱싱한 꽃무덤은 내 안에서 오래 살아 있다. ...

 격정에 휩쓸리지 않는 일본 영화다운 이야기 방식이 마음에 들어왔다. 생을 대하는 태도도 그래야겠거니 생각되었다. 쪼그라드는 오까 (엄마)의 작고 거친 발, 열정을 가득 담은 장려한 저녁놀, 아빠가 흰색 칠을 하다 만 배 그리고 <도쿄타워> 위에 서서 이제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 마사야.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 속만 썪였던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식의 오해일지 모른다.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