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장석주

칠부능선 2021. 12. 26. 18:17

 

시력 50년 장석주의 시선집, 고급진 장정이다. 

 

*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이른 나이에 시에 노출된 환경 탓이었을까. 외톨이 소년의 외로움 탓이었을까? 나를 시로 이끈 것은 내 안의 뾰족하게 내민 우쭐한 기분이거나 사춘기의 영웅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시가 내 차가운 이마를 콕 찍어 호명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내 안에 시의 싹이 조그맣게 돋아났으니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었다.

 

 시는 눈썹, 광휘, 계시이다. 시는 늘 걸음이 빨라 나보다 앞서갔다. 저만큼 앞서가는 시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며 꾸역꾸역 시를 썼으나 시에 목숨을 건 듯 살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삶으로 시를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은 듯하다. 그동안 시가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 '시인의 말' 중에서

 

 

 

4부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1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다.

 

2

  나는 쓴다. 쓴다는 것은 제가 지핀 불에 스스로 제 몸을 지지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존재함에 내장된 타성과 피동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쓰기의 자발적 구속, 혹은 하염없는 투신! 쓴다는 행위는 결국 문체에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쓴다는 것, 그것은 불가피한 피의 요청이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필연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15

  시를 쓰기 전에 하는 명상이 도움이 된다. 명상이 한습적 언술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21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은 일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프랑스어로 명상의 깊이를 보여주는 프랑시스 퐁주는 새를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길게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는 그중의 일부다.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퐁주가 원하다고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45

  시인은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산다. 실용주의 가치관이 득세하는 문명세계에서 쓰는 것만으로 존재를 지탱하려는 일을 무용한 열정에 들린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들은 빗방울에서 움직이는 우주를 보고, 모래알에서 퀘도에서 이탈한 별의 현존을 보고, 꽃봉오리를 흔들고 지나는 한줄기 바람에서 탐미에의 몸짓을 본다. 시집이 안 팔리고 시가 헐값 취금을 당하는 이 세태의 천박함에 맞서 시인은 시로써 내면의 소리를 붙잡고, 세속이 품은 신성을 직시하며, 언어로 우주를 건설하려고 한다. 무통문명의 시대에 시람들이 떨쳐내는 고통을 제 몸에 품고 진주를 키우는 시인들이 있기에 권태와 허무와 절망마저 뜻과 생기를 얻고, 우연의 응축들로 이루어진 언어들이 빛난다.

 

102

  조류는 자기 날개짓으로 첫 비행을 시작할 무렵 무리에서 독립한다. 시인의 싹이 있는 자들은 가장 먼저 가족이기주의 라는 울타리를 타고 넘어 바깥으로 나온다. 시를 쓰려는 자들은 한마디로 가족공독체의 규범에 가둘 수 없다. 이들은 정주밍의 도덕에서 보자면 말썽꾼, 후레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109

  시는 기억이 아니라 반反기억이다.

 

118

  상상력은 칼날 없는 검이다. 세계를 베어버리는 데 한 점 거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