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격>, 이라는 제목에 끌려 산 책이다.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물론 달달하지는 않다. 다 아는, 짐작되는 사항을 정리해준다. 내가 읽지 않은 많은 소설들을 등장시켜서 이해를 돕는다. 다시 읽어보니 서문의 희망사항이 딱 맞는다.
페터 비에리는 파스칼 메르시에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썼는데 그 중 내가 아는 건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말로 정리해주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사고의 주변에 머무를 뿐 명확하고 뚜렷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도 실제로는 아주 많다는 것을 저자가 숨기지 않았다는 점도 좋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 이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목표를 이루었다고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서문
* 돈에 관한 지나친 대범함이 다른 누군가의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까닭은 상대방을 왜소하게 만들고 그 나름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을 흔적도 없이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파괴적인 관대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거만함의 표현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은 불편하다. (107쪽)
* 인간은 타인의 자아 존중심을 짓밟고 파괴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잔혹한 일이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은 이런 잔혹함을 그린 작품이다. 이것은 복수의 이야기다. 노부인 클라라 배셔는 젊은 처녀였을 때 알프레드 일이라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다. 알프레드 일은 법정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는 두 사람의 증인을 돈으로 사서 그녀와 동침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게 한다. 클라라 배셔의 소송은 기각당한다. .....
뒤렌마트가 이 작품에서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1차적으로 알프레드 일이 살해당함으로써 복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부인이 복수하려는 대상을 그 밖에도 전체 귈렌 시민들이다. 그들은 노부인의 자아 존중심과 그에 따르는 존엄성을 잃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이야기를 토대로 자아 존중이 파괴되는 복수극을 따로 써도 좋은 정도다.
(297쪽)
* 노화 또는 질병으로 인해 주체로서의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누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의 과정일 뿐이다 결국에는 관계를 이어갈 배우자도 곁을 떠나간다. 누군가를 만나고 대면할 일이 없다 보니 점점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마침내는 고독해진다. 친밀감과 애정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독립성의 상실과 친밀한 인간관계의 상실, 이 두 가지는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또한 인간 소멸의 맨 마지막 과정인 죽음은 존엄과 무관하지 않다. (399쪽)
* 죽을 수 있게 놔두기
누구나 불치병에 걸릴 수 있다. 의학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죽음의 순간을 조금 뒤로 미루고 죽어가는 과정을 다소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병에 걸린 사람이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의료진이 자신에게 적용하는 치료법에 대해 허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가진 사람은 환자 자신인 것이다. (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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