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피로사회 / 한병철

칠부능선 2021. 6. 28. 09:59

얇지만 묵직한 책이다. 

과잉 긍정이 피로사회를 만든다.  피로사회는 스스로를 착취한다. 

'깊은 심심함'을 추구해야지. 이것 역시 강박일 수 있다. 

2010년에 독일에서 발표한 <피로사회>는 각광을 받았다.

11년이 지난 2021년, 바이러스로 인해 팬데믹이 되었다. 전 세계가 공통의 질병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물론 면역학적 기술로 우리는 이겨낼 것이고, 이 사태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서두다.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11쪽) 

 

 

*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72쪽)

 

 

우울사회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 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첫번째 재해석 시도에 따르면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여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 82쪽)

 

 *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재하는 자와의 부정적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이 없다.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