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땅의 예찬 / 한병철

칠부능선 2021. 6. 24. 20:40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땅에 꽃나무를 심고 가꾸며 쓴 3년동안의 정원일기다. 

휠더린의 시와 슈만의 음악이 함께 흐른다. 

땅의 예찬이 무에 새롭겠는가, 그럼에도 순수한 청년스러움에 푹 빠져든다. 

 

 

 

* 한국에서 미선나무 군락지는 일종의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는다. '나무 Namu'란 한국어로 '나무Baum' '미선'은 한국의 전통부채를 가리킨다. 꽃이 부채 모양이어서 미선나무라는 이름이 되었다. 아름다운 이름. 내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무'라고 지을 것이다. 딸이 있다면 '미선' 또는 '나비'라고 지을 것이다.  (56쪽)

 

* 나는 그늘을 좋아하는 꽃들을 몹시 사랑한다. 내 이름 '병철'은 밝은 빛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빛이 아니다. 빛이 없이는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와 빛은 한데 속한다. 그림자가 빛의 형태를 드러내준다. 빛의 아름다운 윤곽이 그림자다.  (75쪽)

 

*내 사랑 버들이 피를 쏟았다. 상처가 너무 커서 살릴 수가 없었다. 나무는 아마 이번 가을에 죽을 것을 예감했던가보다. 봄에 버드나무는 꿀벌 떼에 휩싸여 헛소리를 했었지.

  2016년 9월 25일에 내 사랑하는 나무의 일으켜 세워진 시신 곁에 밤늦도록 머물면서 애도하고, 가을아네모네와 더불어 나무를 생각하며 울었다. 나 자신이 피를 흘린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버드나무가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 나무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여긴 내 애인이었으니. (108쪽) 

 

*사방에 아직도 떡갈나무 낙엽들이 있다. 이것들이 싫다. 이들은 정원의 형태와 색깔을 망친다. 차이를 없애고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든다. 이들은 죽었지만 더는 죽지 않는다. 내 정원에서 죽일 수 없는 것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드는, 죽지 않는 것들이 무성하다. 일종의 추한 떡갈나무 숲 같은 독일의 신자유주의는 모든 차이를 그 서로 다름을 없애버리는 죽지 않는 떡갈나무 낙엽 같다.  (121쪽)

 

* 어린 시절에 나는 자주 조심스럽게 꽈리의 속을 비워서 작은 풍성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 안에서 그것을 굴리고 소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는 정원에 한 조각 어린 시절을 두고 있다. 작살나무는 아침 여명에 반짝이는 보랏빛 진주들을 매달았다.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고, 잔인하게 착취하는 대신 찬양해야 한다. 아름다운은 우리에게 보호라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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