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칠부능선 2021. 7. 7. 17:36

 폭력에 무슨 위상이 있단 말인가. 아니, 폭력에 위상을 입혀? 어쨌거나 <폭력의 위상학>을 잡았다. 

 전작과 이어지는 생각들이 조금 더 세밀하게 펼쳐진다. 

 한병철이 성과사회라고 부르는 오늘의 사회에 폭력은 비로소 타자에서 오는 것이 아닌, 긍정성의 폭력으로 진화한다. 

 자기 자신을 다그치는 폭력,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긍정성의 과잉에서 나온 욕망도 폭력이라는 거다. 

 

 

* 과거 어느 때도 오늘날만큼 삶이 덧없지는 않았다. 이제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의 결핍 앞에 직면한 인간은 신경과민에 빠진다. 과다행동과 결핍 앞에 직면한 인간은 신경과민에 빠진다. 과다행동과 삶의 가속화는 죽음을 예고하는 저 공허를 보상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살 줄도 죽을 줄도 모르는 산송장들의 사회다.  (37쪽)

 

 

* 정치는 중개다. 정치의 중개 작용이 미치는 범위는 법질서, 심지어 정의의 영역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에 커다란 의미을 부여한다. 우정은 중재 기능에 있어서 법과 정의를 능가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입법자는 정의보다도 우정의 보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정은 사회적 공존을 법질서보다 더 효과적으로, 특히 더 비폭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인 정치적 동물 (zoon polirikon)은 친구여야 한다.  (94 쪽) 

 

 

* 투명성의 사회는 모든 것이 전시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전시된 사회에서 모든 주체는 자기 자신의 홍보물이 된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에 따라 평가된다. 전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제의가치는 모두 사라진다.  전시된 얼굴은 모든 '시선의 아우라'를 상실한 채 밋밋한 페이스face가 된다. 페이스는 상품이 된 얼굴이다.  전시의 범람은 모든 것을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맡겨지는" 상품으로 만든다. 전면적인 전시, 고삐 풀린 과시의 문화는 외설적이다. 과잉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사물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노출과 고도한 가시성 속에서 사라진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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