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뒤라스의 글 / 마르그리트 뒤라스

칠부능선 2021. 3. 3. 15:14

원제가 '쓰다'라는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작가에게 글은 무엇이었는지, 글을 '쓰는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를 들여준다. 

뒤라스의 소설들은 영화가 되면서 많은 돈을 벌어주었나 보다. 영화사에서 받은 돈으로 멋진 집을 사고, 그 집에서 아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작가도 기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다. 말년의 세 작품이 그의 명예와 부를 가져다 주었다. 

짧은 메모 같기도 하고... 내가 말하는 글의 씨앗인 듯 하다. 

 

*

 굴속에, 굴 깊숙한 곳에, 거의 완전한 고독 속에 자리 잡기, 그리고 글쓰기만이 구원을 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그 어떤 주제도 없이,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있기, 그것은 책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기, 스스로를 되찾기다. 텅빈 광활함, 잠재적 상태의 책, 무無 앞에 있기, 마치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끔찍한, 끔찍하도록 이겨 내기 힘든 것 앞에 있기, 나는 믿는다, 쓰는 사람은 책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손이 비어 있고, 머리도 비어 있다. 쓰는 사람이 책의 모험에 대해 아는 것은 미래도 반향도 없는, 멀리 있는, 철자법과 뜻이라는 기본적 황금률로 주어지는 메마른 글뿐이다.  

 (P 17)

 

* 「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죽음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다. 어쩌면 마지막 날,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젊은 영국인 조종사는 독일군 포대를 공격했다. 그냥 장난이었다. 그렇게 독일군 포대를 공격했고, 독일군의 반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그 아이에게 포탄을 쏘았다. 스무 살 아이.

  아이는 비행기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1인승 메테오르였다. (P 51)

 

*로마 

 그 몸은 사막을, 전쟁을, 로마의 열기와 사막의 열기를 지나야 했어요. 갤리선과 유배의 악취를 지나야 했고요.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훤칠해요. 키가 커요. 말랐고요. 마른 몸, 죽을만큼이나 마른 몸이 되었죠. 머리카락은 검은 새의 색이에요. 눈동자의 녹색은 동방의 검은 먼지와 뒤섞였고요.

 눈은 이미 죽음에 잠겨 있어요. 

(P 95)

 

*순수한 수

 독일 혈통의 '순수성'이 독일의 불행을 초래했다. 바로 그 순수성이 수백만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 갔다. 독일에서 순수성이라는 말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고 살해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P 100)

 

 지금껏 비교된 적이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수, 아무런 설명없이 주어진 순수한, 단어 그대로 순수한 수, 그 수가 바로 진실인 것이다. (P 101)

 

* 회화전

 마침내 우리는 그를 고된 노역에 홀로 남겨 둔다. 그가 혼자 불행을 감당하도록, 그 어떤 주석도 은유도 모호성도 감당하지 못하는 끔찍한 의무를 이어 가도록, 그러니까. 그를 그 자신의 이야기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우리는 그라 그린 그림의 폭력 속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이제 그 그림을 쳐다보고, 남자, 말하는 사람, 화가, 침묵의 대륙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림을, 그림만을 바라본다.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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