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푸르고 푸른 몰타

칠부능선 2017. 5. 19. 17:57

푸르고 푸른 몰타

노정숙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 이곳에서는 ‘말타’라고 한다.

늦게 도착해서 숙소의 창문을 여니 가까이에 널찍한 돌로 쌓은 요새 같은 성벽이 마주 보인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답다.

석회암 건물 위로 본 하늘은 푸르고 푸르다.

성당 앞 노천카페와 화려하지 않은 상가들, 수도라고 해도 걸어 다닐 수 있는 넓이다. 기둥만 남은 그리스 신전 터는 보수 공사 중이다.

군데군데 페인트 칠이 벗겨진 담, 허물어진 성벽을 그대로 두었다. 자세히 보면 새 건물도 있지만 색을 희게 칠해서 옛 건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건물의 나이테가 상아색 라임스톤에 담겨있다.

몰타는 제주도의 1/5도 안 되는 넓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페니키아, 카르타고로부터 유럽의 전신 왕조와 공국의 지배를 받고 1964년에서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성 요한 기사단이 몰타를 통치하고 있던 때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부딪치는 최전선이었다.

이들은 적은 숫자로 몰타시민과 함께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나폴레옹이 몰타로 들어왔을 때 같은 그리스도 국가와는 전쟁을 안 한다며

철수하고 로마로 옮겨감으로써 268년의 통치가 끝났다.

기사단의 휴식처였던 발레타 가든은 매일 거행하는 대포 발포식을 기다리는 여행객들로 활기차다.

시간이 되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성벽 아래에서 베이지색 복장을 한 기사는 대포에 장전을 한다.

푸르고 푸른 지중해를 향해 펑, 평, 예고된 폭음이 울리고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허공을 가른다.

종교와 생명을 지키던 성 요한 기사단의 높은 뜻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쨍한 햇살 습기 없는 열기는 미세한 입자로 몸 곳곳에 스며든다. 속으로 팔랑팔랑 바람을 날리며 거리를 걷는다.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에 갖가지 색깔을 칠한 문과 발코니의 조화는 예술이다.

문 옆에 마주 놓은 오크통이나 화분들과 세월을 품은 낡은 벽도 그대로 작품이다. 비탈진 골목을 배경으로 서면

누구든 화보의 주인공이 될 것 같다.

하루는 배로 섬 투어를 했다. 아침에 호텔 앞 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항으로 이동해서 큰 배로 옮겨 탄다.

고조 섬에 내려 작은 보트를 타고 푸른 동굴을 30분 정도 돌아보는데 요금은 후불이며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면 안 받는단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주는 것이라며 사공이 농을 한다. 긴장을 거두고 가볍게 보트에 올랐다.

보트는 좁은 입구를 지나 곡예 하듯 굴로 들어간다. 바다는 잉크 빛과 사파이어 빛 사이사이 신비로운 켜를 만들며 일렁인다.

‘블루 그로토’, 이름이 같은 카프리 섬에서 본 ‘푸른 동굴’이 떠오른다. 카프리의 푸른 동굴은 푸른빛이 굴절에 의한 빛이라서 그날그날

기후에 따라서 물빛이 바뀌지만 이곳은 내내 푸른빛이다. 해안모래가 속살을 드러내는 곳에서는 더욱 투명하게 반짝인다.

어떤 보석이 저리 빛날까. 숙련된 장인이 원석을 이리저리 커팅하며 보여주는 듯하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이 빛을 나는 비원悲願의 색이라고 명명한다. 티 없이 명랑한 파랑, 달뜬 감성의 푸른, 우울한 블루까지 담아

가슴 깊이 간직한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 이 빛을 떠올려 보리라. 마음 보다 재빠르게 나가던 몸에 제동이 걸렸다.

몸이 아프다며 찡그리는 표정을 이해 못했는데 내 일이 되었다. 내 발밑을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의 목 디스크가 오고,

마음처럼 내달릴 수 없는 몸이 되고나서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는 법을 익혔다.

목근육을 만드는 이 동작을 하면서 몸에 맞춰 마음까지 낮아진다.

파도에 깎이고 바람을 받아낸 바위 절벽은 기기묘묘하다. 푸른 창문Azure Window이라 부르는 바위에는 아치형 문이 뚫려있다.

수심이 깊은 짙푸른 청색에 잠시 두려움도 느낀다. 파도가 스치는 밑동과 굴곡진 곳이 보랏빛 자수정 같다.

수수천년 바다와 하늘과 태양이 꾹꾹 다져 만든 색이다.

블루라군이 있는 작은 무인도 코미노 섬에서 수영을 했다. 파라솔을 잠깐 빌리는데 20유로다.

이곳의 싼 물가에 비하면 바가지요금인 듯한데 탈의실이나 샤워장도 없다. 유럽여행객들이 바글거리는 해변에서 지중해를 베개 삼아

하늘을 보며 둥둥 떠 있는 맛도 괜찮다. 젖은 수영복 위에 원피스를 입었으나 다시 배에 타기 전 이곳의 열기가 다 말려준다.

이곳 사람들은 친절하고 온화하다. 거리의 상인도 악사도 소란스럽지 않다.

가톨릭 나라의 근엄함이 스몄다고 할까. 여행객들마저도 조신하게 되는지 적막한 골목에서도 저절로 소곤거리게 된다.

중세의 풍모를 간직한 몰타, 덧칠하지 않은 역사가 가만히 숨 쉬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한 신사도와 피투성이 마녀사냥으로 웅성거렸을

광경을 그려본다. 신을 앞세웠던 중세의 얼굴은 어둡고 무겁지만, 몰타의 하늘과 바다는 푸르고 푸르다.

 

 <에세이포레> 통권 82 -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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