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봉과 왕

칠부능선 2017. 9. 7. 22:56

 

봉과 왕

노정숙

 

 

가끔 가는 식당에서 번개모임을 했다,

낮술을 한잔하며 시킨 해물숙주볶음이 접시바닥에 착 까부라진 채 한쪽으로 쏠려서 나왔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후배가 나섰다.

2만 5천원짜리 안주가 이건 아니라고 항의를 했다. 잠시 후 새로 만든 숙주볶음이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나왔다. 숙주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사과를 하고 서비스로 문어 한 접시를 갖다 준다. 나는 이럴 때 낯붉히는 게 두려워서 항의하지 않고 그 식당을 다시는 가지 않는다.

내게 제명될 식당을 후배가 구해준 셈이다.

오래 전,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갔을 때다. 내가 수박을 사왔는데 속이 덜 익어 씨가 허옇다. 나는 버리고 말자고 했는데 친구가 반으로 쩍

갈라진 수박을 들고 수박가게로 갔다. 그 당시 유원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왠지 거칠고 무서웠다. 친구는 큰소리도 내지 않고 조곤조곤

따지더니 더 크고 잘 익은 수박으로 바꿔왔다. 매사 야무지게 사는 이 친구는 지금도 나를 경탄하게 한다.

여행 중에 기념품 가게에서 앙증맞은 열쇠고리를 내가 만원에 3개를 사온 후에 다음 사람은 만원에 5개를 사온적도 있다.

허술한 내 소비는 선의善意 없이 봉이 되기도 한다.

고객은 봉이거나 왕이다. 예전엔 고객이 봉이었지만 지금은 고객이 왕인 시대가 되었다. 각종 서비스 센터에 가면 넘치게 친절하다.

대기업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던 지인의 딸이 몇 달 만에 병이 났다. 불만 접수를 하는데 대뜸 반말과 욕설을 퍼부으며 인격모독에 성희롱까지 하며

자신을 왕으로 착각하는 ‘고객님’ 때문이란다.

일본 전자제품매장의 판매직원이 쓴『그래도 고객이 왕입니까?』는 매장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하는 고객, 개념 없는 진상고객들의 체험담이다.

책으로 묶을만한 가치는 의심스럽지만, 양쪽 입장 모두 반성과 통찰할 거리는 있다.

‘고객이 왕이다’라고 처음 슬로건을 내건 호텔 경영인 세자르 리츠, 당시 그가 상대한 고객은 실제 귀족과 왕족이었다. 그들의 처신은 항상

옳았다는 것이 그의 경영 이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왕이나 귀족에게는 그들만의 도덕과 품위가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왕은 수라상을 받을 때 전국에서 온 산해진미 앞에서 생산지 백성들의 안부를 묻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흉년이 들면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고기반찬을 금했다고 한다. 왕의 위엄에는 애민愛民정신이 있다.

가끔 봉이 되고 때로는 왕 대접을 받으며 우리의 소비생활은 이어질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될 이 거래에는 책무의 도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배려의 도가 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도를 중시하는 나는 실은 비겁하고 게으른 소비자다.

 

 

<좋은수필> 201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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