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도동서원에서 그를 생각하다

칠부능선 2017. 9. 24. 12:36

 

도동서원에서 그를 생각하다

노정숙

 

 

제17회 수필의 날 행사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행사를 성대히 마치고 다음날 3호차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도동서원이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서원 입구에서 수령 4백 년의 은행나무를 만난다. 거대한 은행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뻗고 아래로 늘어뜨려 커다란 분재를 보는 듯하다. 쇠하고 처진 몸에 수형을 잡는 철사대신 군데군데 시멘트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받침기둥의 시기를 놓쳤는지 뻗은 가지 하나가 땅에 박혔다 일어선 것이 보인다. ‘김굉필 나무’라 이름 붙은 이 나무는 그야말로 굉장하다. 이제 올라오는 여린 잎에서도 거친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은행나무는 천심이 내려지는 신목神木이라지만 세월을 이겨내는 건 벅찬가 보다. 상처투성이 질긴 생명력에 숙연해지며 5백 년 전 사람, 김굉필을 생각한다.

 

그는 단종 때 서울에서 태어나서 대구 현풍에서 성장하였다. 호를 스스로 한훤당寒暄堂으로 지어 불렀다. 차고 따뜻한 집이라니 감성과 이성의 결합체란 뜻일까, 차고 따뜻한 일의 반복이 삶이라는 뜻이었을까. 활달했던 그는『소학』에 빠져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그를 떠올리니, 위로 자라지 않고 옆으로 퍼지는 은행나무의 겸양이 소학동자의 성정답다. 소학을 통해 일상생활의 범절과 수양을 익힌 그는 나이 서른에 이르러서야 육경을 섭렵하였다.

도동은 성리학의 ‘도가 처음으로 동으로 건너오다’라는 뜻으로 그의 업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우리나라의 도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강조하는 독창적인 학문이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을 김굉필이 널리 퍼트렸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귀양을 갔다. 그는 형을 감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리려는 후배를 만류하고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낸다.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써 영남 사림의 도학을 경기도, 전라도, 평안도 등 전국으로 확대하며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도학의 최고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51세의 나이로 극형에 처해졌다. 형장에서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몸과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 받았으니 이 수염은 칼날에 다치게 않게 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노방송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늙은이 푸른 수염 날리며 길 먼지에 몸 맡기고

勞勞迎送往來賓 수고하며 오고가는 길손 보내고 맞는다.

歲寒與爾同心事 한겨울에 그대와 마음 같이하는 이

經過人中見幾人 지나는 사람 중에 몇몇이나 보았는가.

 

김굉필이 밀양의 길가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면서 읊은 시다. 세상풍파를 겪으며 끝까지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변치 않을 마음을 가진 이를 헤아리고 있다. 자신의 말년을 예견한 듯 비장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연에 얽혀서 산다. 스승 때문에 유배를 가고 결국 참형을 당했지만,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잘 키워낸 제자들 덕분에 그의 업적이 재평가되어 사후에 영의정의 품계를 받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었다.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이끈 다섯 명의 대가 - 조선 오현五賢의 으뜸이다.

 

현자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권력은 어리석음과 깨우침이 커다란 주기로 반복한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을 생각한다.

천륜과 인륜이 성가시고 귀찮아졌나. 극악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건 사고들이 넘치는 요즘이다. 인간의 기본 도리가 바르지 않으면 그 위에 품격은 자리할 수가 없다. 그가 무장했던 소학 정신은 맥을 잇지 못하고 무례와 반목이 난무한다. 먹을 것 입을 것 넉넉해진 세상에서 우리의 예절은 더욱 가난해졌다. 넘치는 정보와 빛나는 기술 앞에 사람은 더욱 작아졌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깨끗하고 조촐한 인품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신목 앞에서 심란한 마음을 풀썩인다.

그의 소학 정진을 새기며, 나를 깨우고 흔드는 수필을 거듭 생각한다.

 

<밖에서 본 대구> 2017 수필의 날 기념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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