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애인

칠부능선 2018. 3. 7. 19:50

애 인

노정숙

 

 

오늘은 세 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애인과 매일 화상통화를 했는데 어느 날부터 딱, 정색을 하며 앞으로 화상통화하기 싫다고 했단다. 한동안 잠잠했다. 보고픈 마음이 더 강했던지 서운함은 스스르 무너지고 짬만 나면 전화를 해댄다. 하긴 자꾸만 보고 싶은 게 애인이 아닌가. 남편은 내 눈을 피해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반갑게 통화를 하고나면 하루는 싱글거린다. 저런 속없는 사람과 내가 지금껏 살았단 말인가, 그야말로 자괴감이 든다. 도대체 연애의 기본인 ‘밀당’을 모르는 천치다. 적당히 궁금하게 놔두면 저쪽에서 연락을 할 텐데 그걸 못 참고 목을 맨다.

수수백년 전 나랑도 그랬다. 애인이던 시절이 잠시 있기는 했다. 밀고 당기고 설렐 틈도 없이 밀어붙여 바로 결혼에 이르렀다. 평생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난 그런 소릴 들은 기억은 없고, 이 사람이 나 없으면 안 되는가보다고 생각했다. 속전속결은 내 성질이기도 하다. 계산 없이 내린 결단, 안이한 결정에 값을 오래도록 치르며 산다.

 

사실 남편보다 먼저 나도 순열한 애인을 기른다.

세상은 가차 없는 시험장이라서 때론 피 흘리는 투사가 되어야 하고 뜨거운 햇살에 맨몸을 드러내야 한다. 시대가 아프다. 위로가 필요하다. 애인을 생각하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바람 숭숭 드나드는 마음을 다잡는다. 내 애인은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도 가슴 속 깊이 그를 모셔두면 깨어있을 수 있다. 그는 내게 짧게 말하며 털어버리는 법과 길게 풀어놓으며 너그러워지는 법을 일러준다. 열락에 들뜨게도 하고 절망에 빠지게도 한다.

늘 긴장해야하는 게 힘들어 잠깐 그를 멀리 한 적이 있다. 황홀할 일도 불안한 일도 없는 일상, 그의 손이 멀어진 머리는 단정한데 풀어내지 못한 머릿속은 친친 엉켜있다. 모든 만남과 풍경이 새겨지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사는 게 싱겁다. 도대체 마음이 헛헛하다. 다시 만난 우리는 틀을 벗고 자유롭기로 했다. 내가 나다워지는 일을 그는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그는 내게 벗으라고 한다. 관념을 벗고 통속과 한계를 벗으라고 한다. 그래야 새뜻한 내가 보인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품이 만만하지 않다. 적당히 벗은 내 몸이 자꾸 부끄럽다. 설렁설렁 던진 고백은 한 순간 바닥에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적당한 때 등을 보이는 것도 방법이다. 용기가 필요한가, 비굴이 필요한가. 다시 갈등이다. 이 주기적인 갈등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까.

 

남편은 나와 달리 깊은 고민이 없다. 애인이 집에 온다고 하면 그는 날개를 단다. 평소 안 하던 청소기를 돌리고 방 정리를 한다. 때로는 이불을 산뜻한 색으로 바꾸라는 과한 주문도 한다. 애인은 넓은 거실보다 남편 방 침대 위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애틋함은 사라지고 그냥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의 애인에게 질투가 없다. 남편은 자신의 불만을 내 애인에게 쏟아내고 자신에겐 웃는 얼굴만 보이라고 한다. 나는 남편이 어린 애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러주기도 한다.

남편의 애인은 “그렇게 담배 피우면 나 오래 못 봐요” 내가 하지 못하는 정신 번쩍 나는 말을 날리기도 한다. 삼겹살은 상추에 쌈장을 넣고 짠지는 길게. 딸기는 많이. 당당하게 식사 주문도 한다. 언제부턴가 그는 남편의 얼굴 보는 것보다 지갑 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예전엔 쭈뼛거렸는데 요즘은 아예 원하는 목록을 제시한다. 남편은 허허대며 털려준다.

애인은 봄이다. 온몸에 꽃기운이 돌게 하고, 삽시간에 스러져 참혹하게도 한다.

외손자를 짝사랑하는 남편과 글을 애인으로 두고 사는 나, 우리는 함께 또 따로 감질나는 사랑을 한다. 잠시 희열이고 내내 절망이라도, 애인 없는 삶은 퍽퍽하다. 우리는 각자 애인에게 총애를 받으려 총력을 기울인다.

 

 

<한국수필>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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