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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교수님' / 서의식

칠부능선 2012. 3. 12. 13:45

‘선생님’과 ‘교수님’

 서의식


신입생들은 흔히, 강의시간에 조차,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대학교 교수는 그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면에서 초 중 고등학교의 교사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그들이 가졌을 특별한 존경의 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교수님’이라 불릴 때, 어쩌다 대학 사회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일종의 슬픔을 느낀다.

남을 부르는 호칭은 대가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선택되기 마련이다. ‘나와의 관계’라는 주관적 측면과 ‘그의 공적(公的) 지위’라는 객관적 측면이 그것이다. 나와의 관계가 항구적일 경우는 주관적 호칭을,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객관적 호칭을 사용함이 일반이다. 이를테면 ‘아버지’ ‘어머니’는 전자, ‘사장님’ ‘국장님’은 후자의 예다.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와, 업무 등으로 한시적(限詩的)으로 만난 이를 구별하려는 뜻이 그 호칭에 담겨있는 셈이다. 따라서 주관적 호칭에서는 정(情)이 싹트지만, 객관적 호칭을 통해서는 갈수록 분별의식이 깊어지게 마련이다.

‘선생님’은 나와의 관계를 부르는 말이고, ‘교수님’은 그 공적 지위,직함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니 고등학교까지 나를 가르친 이는 ‘선생님’이고 대학교에서 나를 가르치게 된 이는 ‘교수님’이라는 의식의 내면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대학교에서 맺은 관계는 한시적이라는 전제와, 혹시 생길지도 모를 사제의 정을 아예 싹부터 없애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초 중 고의 선생을 ‘교사님’이라 부르지 않았으면서 굳이 대학 선생은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분별의식이 슬프다.

그리고 ‘선생님’보다 ‘교수님’이 더 존경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호칭이라고 여기는 데 더욱 더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본디 ‘선생님’은 ‘상감’이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와의 관계가 죽음에까지 이르고,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위에 더할 데 없는 존재였다. 오죽해야 선생님을 부를 때 아버지에 대한 칭호를 더하여 사부(師父)라 하였겠는가? 공자 노자의‘자'가 선생님의 뜻이니,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은 남을 가르치는 자가 늘 바라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고귀한 호칭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이에게까지 적용되기에 이르러 ‘김선생님’‘이선생님’이 ‘김씨’ ‘이씨’의 별칭으로 쓰이는 지경이니, 비록 언어의 뜻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유독 ‘선생님’이 이렇게 마구 쓰이게 된 것은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교육의 의미가 그만큼 경시되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교육자로서 왜 슬프지 않겠는가?

대학은 진리와 학문의 장이며, 이에 대한 추구는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흔히 학문의 첫걸음은 어학(語學)이라 이르거니와, 이때의 어학이란 philology의 번역어로서, 도구로서의 언어 (말)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문헌에 나타나는 어원(語源)이나 그 본연의 의미, 또 그 의미의 역사적 변화 등을 밝히는 학문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philology를 때로는 문헌학이라 번역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름지기 향학(向學)의 갈망을 지닌 대학인이라면 ‘선생님’과 ‘교수님’의 저와 같은 의미를 제대로 알고 써야 마땅하다.

교수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교수직에 있는 이를 그 제자가 아닌 이가 부르는 호칭으로 ‘교수님’을 쓸 수 있지만, 제자 된 사람이 선생님을 교수님이라 칭하는 것은 결례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덜 성숙한 학자이기로, 제자로부터 ‘선생님’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왜 섭섭하지 않으랴?
나는‘교수님’이기보다 ‘선생님'이고 싶다.


서의식 : 서울산업대 인문사회자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