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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생각 / 임철순

칠부능선 2012. 1. 11. 20:41

 

2012.01.10

몸에 관한 생각


임철순

 

우리말에서 중요한 것은 다 한 글자로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강 글 길 꽃 낮 달 돈 돌 똥 말 물 밤 밥 별 불 비 산 살 새 쌀 일 정 책 해…. 얼핏 생각나는 대로 써봐도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될 자연과 중요한 사물은 다 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꽃이라는 글자는 어쩌면 그렇게 꽃처럼 생겼는지 볼수록 좋습니다.

몸도 한 글자입니다. 새해를 맞거나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누구나 건강을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은 마음에도 해당되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당연히 몸 문제입니다. 한 해 동안 내 몸은 얼마나 더 늙었는지, 건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 여부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은 눈 코 입 귀, 이렇게 한 글자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얼굴은 낯이라고도 합니다. 몸에는 두 글자 이상인 것도 많지만 턱 목 손 발 팔 등 배도 다 한 글자입니다. 그만큼 몸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예술의전당에 춤 공연을 보러 갔을 때입니다. 뒷줄에서 “몸이 전부잖아요.” “인간은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무슨 대단한 철학적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습다 싶으면서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 몸 자체가 표현도구인 예술, 특히 발레를 비롯한 현대무용과는 아직도 잘 사귀지 못한 편이어서 눕다시피 몸을 뒤로 젖히고 코도 좀 골면서 대충 공연을 봤습니다.

인간의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배웠습니다. <효경>에 나오는 이 말은 몸이든 뼈든 터럭이든 피부든 감히 손상되지 않게 경건하고 건전하게 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나는 지금 편모슬하에서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지만, 그런 점에서 보면 불효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효도하기는 애시당초에 이미 글렀습니다.

몸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싶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와 사선을 숱하게 넘고 넘어 장하고 대견스럽게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땐가 고향인 공주의 계룡저수지 수문 근처에 장난삼아 들어가 물살에 휩쓸렸다가 간신히 살아난 게 구사일생의 시작입니다. 술에 취해 따지며 깐죽거리다가 대학 선배가 휘두른 맥주병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업혀서 한밤중에 병원에 입원했던 사건은 이마에 선명하게 흉터로 남아 있습니다. 술에 취해 빙판에 미끄러져 붕 떴다가 떨어지면서 뾰족한 돌에 턱을 찔린 자국도 잘 새겨져 있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은 아니었지만 꽤 큰 수술 자국, 종기 자국도 있습니다. 미국의 데스 밸리(Death Valley) 사막에서 당한 교통사고는 몸의 상처 대신 기억 속에서 선명합니다.

문제는 항상 연말의 술자리였습니다. 1978년이었던가, 12월 31일 회사에서 준 냉주(찬 정종)를 마시고 2차로 한 잔 더 한 뒤에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무슨 객기에선지 둑 위로 올라갔습니다. 고래고래 노래 부르며 흔들비틀 갈지자로 걷다가 5~6m 아래 개울에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안 죽었는지, 어떻게 기어나왔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오버코트가 흠뻑 젖어 다음 날 부장 집의 신년하례에는 덜덜 떨며 양복만 입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이 10m쯤 되는 계단에서 구르지도 않고 급전직하, 육탄돌격하듯 바로 밑으로 떨어졌는데 멀쩡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술에 취하면 오히려 다치지 않는다는, 그 잘난 맹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요? 무용가든 운동선수든 모델이든 윤락녀든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 몸이 곧 재산인 사람들에게는 몸의 상태와 변화가 중요한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은 대체로 좀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나도 최근에야 내 몸만의 어떤 특징을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픽 하고 웃을 만한 것들이어서 굳이 이 비밀을 공개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남들이 내 귓구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나는 참 싫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처럼 사람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귓구멍이 훤히 뚫리고 널리 열려 있어야 세상의 온갖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싫습니다. 콧구멍을 남들이 들여다보는 것도 싫습니다. 나는 늘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는데, 머리를 감겨줄 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눕다 보면 콧구멍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게 정말 싫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 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미장원 아줌마는 수줍은 사나이의 이 여린 순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득도한 고승들은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몸을 사람의 생명과 정신이 잠시 머물다 가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벗어나는 열반을 그 동안 쌓인 집착을 끊고 내생을 받는 일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요? 최근 입적한 지관(智冠) 스님도 미리 써둔 사세게(辭世偈)에서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라고 했습니다. 스님의 시신을 법구(法軀)라고 하던데, 언론인으로 오래 일한 사람은 언구(言軀)라고 하면 안 되나, 이런 실없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몸에 관한 시를 읽어봅니다. 큰 병을 앓다가 겨우 소생한 나태주 시인은 <몸>에서 ‘당분간은 내가 신세 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중략)/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살다보니 그만 전세집으로 바뀌더니/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모아둔 돈은 줄어들고/방세는 점점 오르고/그러나 어쩌겠나/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김사인은 <노숙(露宿)>에서 물끄러미 몸을 들여다 보며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의 감성에 공감이 갑니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순한 너를 뉘었으니/어찌하랴/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어떤가 몸이여.’ 그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해마다 연초에 사람들이 기(氣)를 받는다며 많이 찾는 강화도 마니산의 어느 산길에는 인간의 몸에 관해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1년간 당신의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심장은 3,679만 2,000번 콩닥, 눈은 788만4,000번 깜빡, 폐로는 381만9,000리터의 공기가 들락, 머리카락은 12.7cm나 쑥쑥, 걷는 길이는 2,510km를 종종, 자는 시간은 2,555시간 쌔근쌔근’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산수인지 잘 모르겠지만, 몸의 중요성을 알라는 취지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몸은 나 하나의 몸이 아니며 아득한 선조로부터 내려온 유전자의 집합체, 우리 가정과 이 사회의 공공재(公共財)라는 사실을 조로(凋老)와 낙치(落齒)의 갑년(甲年)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ㆍ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ㆍ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까지는 내 알 바 아닙니다. 다만 새해 들어 이 며칠 감기몸살로 시들시들 앓다 보니 내 몸이 그렇게 소중한 공공재인 만큼 사는 날까지 잘 아끼고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