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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면서 살기 / 임철순

칠부능선 2011. 9. 8. 08:22

잊히면서 살기

2011.09.08

임철순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부리캉 무두셀라 수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

수한무, 거북이(정확한 맞춤법으로는 거북),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은 다 오래 사는 사람이나 동물입니다. 옛날 어떤 양반집에서 아이가 오래 살라고 이렇게 긴 이름을 지었는데, 어느 날 하녀가 집에 뛰어 들어와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라고 긴 이름을 숨가쁘게 읊으며 큰일났다고 알리는 동안에 물놀이하던 아이는 이미 물에 빠져 숨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긴 이름은 인기 TV드라마‘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자주(?) 읊어 잘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씨가 13일 밤 한 TV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이름은 원래 자신이 썼던 것이라고 밝힌다고 합니다. 기억하는 분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1970년대에 인기가 아주 높았던 코미디 프로그램‘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구봉서 씨와 배삼룡 씨가 출연할 때 나왔던 이름입니다. 그 뒤에도 이 긴 이름은 방송에 간간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로부터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웃으면 복이 와요’는 아예 모르고 현빈을 잘 아는 사람들(특히 젊은이들)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지난해 명콤비였던 배씨를 잃은 구씨 자신도 뇌졸중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니 자신의 일과 시대에 관해 정확한 증언을 남기고 가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미 녹화를 통해 긴 이름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원조임을 밝혔다고 합니다.

사실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요즘 세태가 원망스럽거나 고까울 수 있습니다. 전통과 고전은 그만두고라도 불과 한 세기, 아니 한 세대 전의 일과 사람도 쉽게 잊히는 세상이니까요. 예를 들어 20~30년 전에 유명했던 사람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정작 찾는 사람은 안 나오고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들에 관한 정보만 잔뜩 뜹니다. 더구나 요즘은 한자도 잘 쓰지 않는 세상이니 누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기도 어렵습니다.

최근 한국 현대무용 1세대인 무용가 박외선(朴外仙) 전 이화여대 교수가 미국에서 96세로 타계했지만, 그분을 아는 사람은 이미 많지 않습니다. 그분의 남편이었던 유명한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ㆍ1905~1966)씨를 아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리고 많은 언론의 보도에서 보듯이 그분의 부음은 본인 자신보다 시인 마종기 씨의 모친상으로 더 알려졌습니다. 사실은 마종기 씨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지난해 5월, 가수 백설희 씨가 타계했을 때도 백씨 자신보다 가수 전영록의 어머니, 가수 티아라(전보람)의 할머니가 사망했다고 보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영록을 아느냐, 티아라를 아느냐에 따라 또 세대차가 납니다. 백씨의 남편이 유명 영화배우 황해(본명 전홍구ㆍ1921~2005)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가수 황금심(1922~2001)씨가 타계했을 때 그가 누군지 몰라 기사를 쓰지 않으려 했던 가요 담당 기자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이든 사람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기는 고사하고, 이름이 알려지고 기억되기라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은 자신이 명망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세상은 그렇게 한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 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골프장에서 티 오프를 기다리며 일행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여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리더랍니다. “어머, 저 사람 이어령 아니니?”한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여자가 “얘는! 그 사람 죽은 게 언젠데?”그러더랍니다. 그 여자들은 자신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던 대학 출신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여 버린 것은 그의 글이 교과서에도 실린 데다 그 자신이 이미 고전이 돼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도 그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집에 뭘 고치러 온 수리공이 집안의 수많은 상패와 기념패를 쓱 훑어보더니 이씨의 부인에게 “이 집 아저씨가 글깨나 쓰나 보지요?”라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이 “그래요. 글 좀 써요”했답니다. 10여 년 전 한일 국제세미나가 열렸을 때, 우리 말을 일본어로 통역하던 한국인 여성은 이어령 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오용, 이오용”하고 발음해서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어’가 잘 안되니까 일본인들을 위해 계속 ‘오’라고 한 건데, 그가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설마 그렇게 발음했겠습니까?

세상에 이어령 씨 같은 최고의 지성, 국제적 저명인사도 몰라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물며 범상하거나 남들보다 약간 뛰어난 처지에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자신을 안철수나 유명 연예인처럼 알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은 곧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늘 하면서 지금 이대로, 생긴 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년부터 한국일보 근무. 현재 주필. 시와 술과 유머를 사랑하고,
불의와 용렬을 미워하려 애쓰고 있음. 호는 淡硯(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