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 윤오영

칠부능선 2011. 4. 1. 00:34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윤오영(尹五榮, 1907-1976)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 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으므로 매화(梅花)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蕭瑟)한 바람이 상강(湘江)의 넋*을 실어 오는 듯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神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들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심안(心眼)이다.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백아(伯牙)가 있고, 또 종자기(鍾子期)*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뜻을 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공민(共悶)이요, 사회의 공분(共憤)이요, 인생의 공명(共鳴)인 것이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片貌)와 생활의 정회(情懷)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하고 산만할 수가 없다.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의 여운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고, 이런 글이 읽고 싶다.

 



■ 註:
* 상강(湘江)의 넋: 중국 고대 삼황오제의 마지막 임금 순(舜)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왕비를 두었는데 모두 요(堯)임금의 딸이다. 순임금이 남쪽 창오(倉梧) 지방을 순시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두 왕비가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소상강(瀟湘江)까지 와서 슬피 울었는데, 두 왕비의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 잎에 떨어져 반점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 또는 ‘이녀죽(二女竹)’ 이라 하여 ‘슬픈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상강(湘江)의 넋은 이처럼 슬픈 넋을 말한다.

*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자기를 알아주는 참다운 벗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고사의 주인공들.

*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 말은 다 하였으나 말하고 싶은 뜻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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