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미친~~

칠부능선 2010. 7. 8. 21:59

  다 저녁에 문득, 시어골 친구에게 갔다.

  마당에 심어놓은 갖가지 채소로 만든 셀러드, 그 위에 당귀꽃을 뿌렸다. 독특한 향에 먼저 취했다. 나를 위해 매콤하게 만들었단다. 약콩이 절반인 밥, 앙증맞은 모양새에 톡톡 터지는 것이  구수하기까지 하다. 러시아식 토마토 스튜는 처음엔 밍밍했는데 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빗방울이 깃드는 한밤에 꽃들이 지천인 마당에서 먹은 저녁은 환상, 그 자체다.

  마당 가운데는 키 큰 노란 백합이 그 진한 향으로 압도하고, 식탁 앞에는 꽃을 떨군 매발톱꽃이 씨앗주머니를 여물게 매달고 있다. 상추, 쑥갓, 샐러리, 고추, 호박, 토마토, 먹거리가 한켠에 있고, 납작 엎드린 아주가는 준비 자세다. 장미, 으아리, 산수국이 한창 이쁘다.

  음전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제맘대로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는 수은등 아래서 모처럼의 수다는 시간을 잊었다.

 

  그림 그리는 친구는 러시아 선생한테 자주 듣던 말이 요즘 딱, 머리를 때린다고 한다. 열심히 그렸는데 "머리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단다.

  친구의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난 건 나다. 요즘 머리만 분주하다는 것. 그건 정말 내가 싫어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과 동시에 몸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말이다.  영 개운치 않던 감정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공상인지, 잡념인지, 머리만 시끄러웠던 것, 그래서 기분이 나빴는가 보다.

 

  '바위를 뚫어야 한다' 고 결연하게 말한다.

  이 무슨 말인가. 모름지기 예술, 창작을 하는 사람은 바위를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치열함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화가들의 거지근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들으니, 괜스레 찔린다.

  구구절절 지당한 친구의 말이 왜 이리 슬프게 들리는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손이 문제인가. 손을 앞서 내달리는 머리가 문제인가. 그 지당한 말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는, 뭔가.

  온전하게 홀로 사는 친구가 든든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짠한 건, 뭔지.

  바른 소리 한 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텅 빈 밤길이 낯설어서 한참 헷갈렸다. 에고~~

 둥둥 떠다니는 것도 모자라, 선동, 주도까지 해야하는 나는 또 뭔가. 거절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죄다.

  잊어버리자. 

  미리 걱정하지 말자.

  그래, 바위를 뚫어야지. 언젠가는.

 

 

 

 

 

 

 친구는 갈 때마다 마당에서 꽃을 쓱쓱 잘라준다.

 어제 밤만은 못해도 우리집 거실에도 당귀향, 백합향이 어질머리를 앓게 한다.

 







Филипп Киркоров - 14 Ты повериш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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