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바람, 바람

칠부능선 2010. 1. 8. 14:58


                                바람, 바람

                                                                           노정숙


  이따금 바람이 필요하다.

  태풍이 불어 바다 깊숙이까지 뒤집어 주어야 바다가 썩지 않듯이 내 영혼에도 한바탕 강풍이 불어 가라앉은 기운을 휘저어 주어야 한다. 그 바람이 차고 습해서 류머티즘이 함께 올지라도 지금은 밀어낼 처지가 아니다.

  통도사 템플스테이에 갔다. 일주문 옆, 몇 백 년은 되었을 느티나무가 절반쯤 죽어가고 있다. 분칠하지 않은 고찰의 모습에서 위엄이 전해진다.

  새벽 예불시간에 수십 명의 스님이 등장한다. 넓은 장삼자락 아래 까치발을 한 젊은 스님들이 사뿐사뿐 걸어와 자꾸만 절을 한다. 이어서 뒤꿈치를 바닥에 대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노스님들은 아무런 출렁임 없이 절을 한다. 노스님의 발밑에 바람이 따라붙은 듯 가볍다. 스님들이 경을 외는 소리가 화음이 잘 어우러진 음악으로 들린다. 간간이 들려오는 낯선 단어들이 해독하지 못한 암호 같은데 묘하게 편안하다.

  경내를 돌아보던 중 대광명전 주변에서 널찍한 돌판 두 개를 만났다. 저 먼 날, 영축산 백운암의 깊은 밤에 길 잃은 처녀가 새처럼 날아들었다. 수행 중인 스님과 속세의 여인이 법당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 긴 밤 이후 여인은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 호랑이가 되었다. 호랑이는 밤마다 하늘과 땅을 향해 울부짖었다. 어느 날, 호랑이 등에 업혀간 스님은 남성을 잃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후 처녀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호혈석을 통도사 바닥에 묻어놓았다.

  호혈석의 희미해진 핏빛 얼룩을 보며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석룡으로 묻혀있는 당나라 처녀 선묘가 떠올랐다. 그녀가 흠모한 의상대사는 수도를 위해 사랑을 거절했다. 격랑에 배를 타고 고국으로 떠나는 의상대사를 지켜주기 위해 선묘낭자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스님보다 의상대사가 운이 좋았지만, 두 스님 모두 매정하기는 똑 같다. 정을 몰라야 이를 수 있는 것이 해탈의 경지이며 화엄일승법계인가. 나는 불경스럽게도 씁쓸해진다. 이기적 사랑이든 이타적 사랑이든 죽음에 이른 사랑이야기는 설화일 수밖에 없다.

  내 사랑을 돌아보니 너무도 싱겁다. 흔한 선도 한번 못 보고, 하다못해 집안의 반대라는 장애물도 없었으니 목숨을 걸기는 고사하고 열정이 무언지도 몰랐다. 남편이 된 사람은 단짝 친구의 큰오빠이며 은사님의 조카였으니 설렘은커녕 예전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모험 없이 너무 일찍 나를 내려놓았다. 속절없는 생각은 돌계단 앞에서 멈칫한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적멸보궁 앞에 섰다. 말끔한 돌기둥 사방으로 연등이 달려있다. 선들 바람에 흔들리는 등 마다 바람(願)이 넘쳐난다. 그 속에 매달린 바람들을 보니 색깔은 달라도 비슷한 욕망들이 짐작된다.

  적멸보궁 뒤쪽 소나무숲에 있는 새들은 그 위로 날지 않는다. 허공에 무엇이 보이는 걸까  빙 둘러서 다닌다. 넓은 보궁에는 새똥 하나 없이 적멸 그 자체다.

  소견머리 없는 사람에게 새대가리라고 하던 말을 고쳐야 할 것 같다. 갈 곳과 아니 갈 곳을 알고, 범할 것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새의 갸륵한 소견에 내 뒤가 켕긴다. 육바라밀(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의 공덕을 쌓은 적도 없으면서 내 바람이 잘 늙어 단방에 가는 것이라고 한 소행이 면구스럽다. 극적인 삶에 대한 갈망을 쌈박한 죽음으로 풀고 싶었나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자주 잊는다.

  극락정토에 이른다는 반야용선도를 자세히 보면 지혜를 깨달아 극락으로 가는 사람 중에 뒤를 돌아보는 이가 하나 있다. 피안의 세계를 눈앞에 두고 하염없이 뒤를 돌아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측은지심을 읽는다.

  전력투구의 치명적 사랑을 우상으로 여기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사랑은 측은지심이라는 데 이르렀다.

  잡념으로 분주했던 철야 참선 중간, 휴식시간에 ‘상대하지 않음으로 상대한다'는 고수의 처세법을 들었다. 고수의 정중동은 찬바람이 분다. 상대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가려내지 못하는 내게는 어림없는 방법이다. 실바람에도 부대끼는 내 서툰 처세가 차라리 마음 놓인다.

  이번 바람은 확실했다. 새에게서도 기꺼이 예를 배워야 하는 마음 한 자락 들썩였으니 얼마동안 속뜰이 보송하겠다. 이제 맹목의 내리사랑이라도 치열하게 할 수 있으려나.

  한바탕 비가 오시려나 보다. 서풍이 분다.


<에세이문학 2009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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