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거절의 기술

칠부능선 2010. 8. 23. 15:28

   

            거절의 기술


                                                                       노정숙


  매섭게 거절을 당했다. 공적인 부탁이었는데 그는 안하겠다며 단칼에 끊었다. 화상전화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내 망가진 표정을 감출 일이 난감했다. 그러나 목소리도 얼굴 못지않게 정직하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떨떠름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으리라. 나를 황당하게 한 그는 그것을 솔직한 정공법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사람의 글을 좋아했는데 이름 뒤에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지금 눈길을 끄는 글을 쓰지만 절대로 최고가 될 수 없는 인간이라며 혼자서 눈총을 쏘아댔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공통점이 겸손이라는 것을 경험하며 감탄하던 때였기에 실망이 더욱 컸다. 그 후 생각했다. 거절할 때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배한테 갔을 때다. 어느 단체에서 행사에 초대하는 전화가 왔다. 본인은 꼭 참석하고  싶은 좋은 행사인데 선약이 있어서 몹시 아쉽다며 극진히 거절하는 것을 보았다. 전화를 끊은 후, 내가 “정말이요?” 하고 물으니 찡긋 웃기만 한다.

  순발력도 재치도 없는 나는 선배의 노련한 모습을 닮을 수는 없겠지만 그 처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릭키 제바이스가 감독, 주연한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를 봤다. 거짓말 속에서 살면서 거짓말의 발명이라니, 발칙하고 신선한 발상이다.

  영화 속 세상에는 모두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펩시콜라 선전은 코카콜라가 떨어졌을 때 이용해 주세요, 양로원의 문패는 오갈 데 없는 늙은이들을 위한 슬픈 곳이란다. 결근을 한다고 회사에 전화를 하면서 아픈 게 아니라 당신들 꼴보기 싫어서라며, 사실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 붓는다.

  "미안해요, 지금 자위하던 중인데 마저 하고 올테니 아래층에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데이트를 하려고 찾아온 주인공에게 문을 열어주며 여자가 하는 말이다. 첫 만남에 대놓고 당신은 들창코에 뚱뚱해서 싫다고 한다. 스스로 패배자라고 인정하던 주인공은 이미 많이 받은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를 더한다.

  주인공 마크는 집세를 못내 쫓겨날 상황에 잔고가 없는 통장에서 돈을 찾으며 거짓말이 시작된다. 첫 거짓말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점 이타성을 띠게 된다.

  마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머니에게 사후세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이며, 고통도 없고 사랑과 행복만 가득한 곳이라고 말한다. 사후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라 여기던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임종을 맞는다. 어머니를 위해 상상으로 말한 사후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불안했던 마음을 치유해 주는 하늘 위의 어떤 남자에 대한 막연한 복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마크는 사람들의 추종을 받으며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진실만을 말하는 세상에서 거짓말의 능력으로,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꿈을 심어준다. 마크가 하는 거짓말의 시원始原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다.

  마크는 렉쳐필림의 3류 시나리오 작가다. 사실만을 소재로 해야 하는 이곳에서는 역사물만이 영화의 소재다.  14세기 담당인 그는 흑사병을 배경으로 외계인을 등장시킨다. 상상력을 펼친 작품을 내놓아 인기작가가 된다. 문학이 없던 세상에 문학을 발명한 것이다. 문학의 상상력이란 그럴듯한 거짓말이 아닌가.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여자에게 만은 거짓말을 못 한다. 일 안하고 돈만 펑펑 쓰는 게 소원이라는 여자, 하지만 가슴이 따뜻한 그녀는 마침내 주인공의 진심을 알아차리게 된다. 


  거절은 당하는 사람보다 하는 쪽이 더 힘들 때도 있다. 거절하는 기술이 없어서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오래전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때 내게는 그가 원했던 만큼의 돈이 없었다. 그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하며 차마 거절을 못하고 친구에게 빌려서 주었다.

  그후 그 사람은 더욱 어려워져서 빌려간 돈을 갚지 못했고, 내가 대신 갚아야 했다. 나는 거절하지 못한 값을 오래도록 치렀다. 이 일을 겪은 후 내 사전에 돈거래는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돈빚 못지않게 힘든 것이 글빚이다. 마감날까지 무거운 부채가 머리를 지끈, 누른다. 숙성시키지 못하고 버무려 내놓은 내 풋것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떠밀려서라도 자꾸 쓰다보면 건질 것이 있지 않을까, 뻔뻔스러운 자위를 하지만  면구스러운 일이다.

  거절하지 못한 크고 작은 모임이 줄을 섰다. 그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몸도 마음도 고요할 겨를이 없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임들이지만 우선순위를 정해서 거절하는 것도 필요하다. 

  매서운 거절로 받은 상처에 딱지가 떨어졌나보다. 때때로 근질거리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 뒤에 붙인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표시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얄밉게도 아니, 고통스럽게도 그의 글에 여전히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무려나, 진실만을 말하는 건 잔인하다. 영화 밖 세상에서는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우회적인 자기방어다.

  거절의 기술 안에는 선의善意의 거짓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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