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죽음에 이르는 법

칠부능선 2009. 11. 11. 14:46

    

                            죽음에 이르는 법


                                                                                                                                                                                                                                                                                                     노정숙


  어머니가 쓰러지자 ‘난 죽었다’고 생각했다.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한 순간에 아기가 되어버린 것에 당황했다. 육체가 정신을 놓아버린 속수무책의 시간들이 흘렀다.

  죽을 만큼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다. 여든 살 넘도록 건강하셨으니 억울할 건 없다. 나는 이렇게 쓰러진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위로했다.

  병중 생활이 길어지니 염색하던 머리가 은발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머리를 자른 후에 원하는 염색을 해 드렸다. 자른 것도, 색깔도 맘에 꼭 드신단다. 그런데 저녁에 아버님께서 왜 염색을 했냐며 마땅찮아 하신다. 아버님은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 어머니가 아직도 ‘여자’를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희망인 것을.

  두 분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군말 없는 성격이 똑같다. 깔끔하고 빈틈없는 성격도 같다. 다정한 표현에 어색하고 칭찬에 인색한 것도 똑같다. 살갑지 못한 어른들을 보면 부부는 한쪽이 조금 서툴고, 헐거워야 다른 한 쪽이 그것을 어여삐 여기며 보듬어 주지 않을까 싶다. 

 

  시간은 명약이다. 어머니의 부스러졌다는 척추 4,5번은 시술을 통해 굳어 가는데 놀란 정신은 쉬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움츠려든 마음에 집 밖은 두려움의 공간이 되었다. 창밖의 하늘을 보며 감사하고, 청청한 나무를 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음에 감사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난 왜 한숨이 나오는지….

  운동 삼아 탄천을 걷다보면, 비척대는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살피며 걷은 모습이나 휠체어 에 탄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밀고 나온 모습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 만 앓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기는 어렵다고 한다.  아버님은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해서 정정하시다. 그렇다 해도 외람되지만 팔팔하다는 느낌은 없다.

  젊음이 상이 아니 듯, 늙음도 재앙이나 벌이 아니다. 늙음이 자연현상일 뿐인데, 부모님의 어눌해진 몸을 바라보는 일이 왜 이리 송구스러운지.

 

  큰댁 당숙께서 90세로 먼 길을 가셨다.

  위독하다며 처음 서울 병원에 오신 것이 10여 년 전이다. 자리 보존한 시간을 헤아리니 난감한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91세인 당숙모님은 병수발로 기진하셨다. 힘없이 앉아 계시는 모습이 살짝만 건드려도 툭 떨어져 버릴 풀잎 끝 이슬 같다. 당숙이 눈 감은 후로 잡숫지도 눕지도 않으신다. 아직도 아쉬움 가득 찬 애틋한 모습이 신기하다.

  금슬 좋던 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옛이야기로 남고, 온화하게 흐르던 기품은 설핏 남아있다.

 

  예전에는 삶과 죽음은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라 여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죽음이 삶 가운데 가까이 있다고 느껴진다. 누구나 예정되어 있는 죽음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중요하다.

  죽음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살아온 모습대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놓인다. 오만과 위선으로 살아온 생애를 추한 노년으로 마감한다면 그 적나라함을 어찌 견뎌내겠는가. 겸손하고 신실하게 잘 살아 온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힘든 것은 다음 세상의 안위를 위해 미리 치르는 보속이라 여길 수도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살아온 모습과 상관없이 불공평한 것이 다행이다. 

 

  흥미를 자극하는 제목 때문에 집어 든『평균수명 120세 축복인가 재앙인가』를 읽으며 난 ‘재앙’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삶의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다. 남의 도움 없이 자아실현이 가능한 시간까지의 삶이 축복이다. 

  길어진 수명이 문제다.

  건강할 때보다 병에 걸렸을 때 생에 대한 애착이 커지고, 젊어서 보다 늙을수록 생에 대한 미련이 많아진다니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장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난 홀로 백 세를 살게 될까봐 겁난다.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60년 후에나 가능할 일이라니 다행이다. 내가 방자하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직도 죽음을 관념으로 받아들여서 인지 모른다.

 

  앞으로 노인은 지금 노인들 보다 건강한 상태로 노년을 맞을 것이다. 전쟁이나 극빈한 유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체력도 있고, 아프기 전에 운동하고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도 받는 예방 세대다. 인터넷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이에 상관없이 세상과 오래 소통할 것이다. 열린 마음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지혜를 나눠주며, 사회에 기여하는 노년을 보낼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 좋아진다 해도 내 소행머리로 봐서 ‘9988’은 언감생심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에 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내 몸이 내 소망을 배반하고, 노욕에 빠질지도 모른다. 오십이 넘으며 느는 게 배짱과 가당찮은 욕망인 것을 보면 노추에 들기도 쉽겠다.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좀 더 일찍, 이런 자아비판이 필요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잠시 유예된 시간인데 저물녘까지 어찌 팔팔하길 바라겠는가.

 

  여장부로 사신 친구의 이모님이 93세에 기력이 쇠해지시자 곡기를 끊고 보름 만에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외삼촌이 병중에 들자 누님처럼 깨끗하게 가겠다며 식사를 거부하셨다. 물만 먹고 일주일을 버티다가 ‘밥 가져와라’고 하셨다. 외삼촌은 몇 해 더 살다 돌아가셨다.

  이모님의 의지와 결단을 우러러 존경할 뿐이다. 늘 ‘품위 있는 죽음’을 꿈꾸는 나는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이틀도 못 버티고 밥 달라고 할 것 같다.

  나의 부재가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은 어디서든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과도한 충정에 사로잡혀 있다.

  가끔씩 ‘난 죽었다’고 엄살을 부려가며 산다.


<에세이스트 27호>

 

 

 

 

노정숙의 「죽음에 이르는 법」에 대하여 | 평론 2009.10.30 21:33 유토피아

-이상국

 

어머니가 쓰러 지셨고, 당숙이 돌아가셨으며, 당숙모가 간드렁간드렁 하시고, 친구 이모님이 고상하게 돌아 가셨으며, 외삼촌이 따라하다 실패하셨다. 나 또한 고상하게 죽기는 힘들 것 같다.

 

어머니가 80이 넘어 쓰러지셨다. 부스러진 척추 4, 5번은 나아가는 데 뇌가 말을 듣지 않는다. 처음엔 놀랐지만 80넘게 사신분이라 세월의 무게로 위안을 삼고 육신은 나아가는데 놓쳐버린 정신은 돌아올 줄 모르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9988234란 말은 몇 년 전쯤에 생겨나 노인들 입에서 입으로 구전 되어 한바탕 유행을 타다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 말이 있은 지 반년이 지났나, 어느 못된 며느리, 아니면 어느 노인의 자괴적인 한 마디

“9988234, 흥, 택도 없다! 이 늙은이야.”

 

들떠 있던 고령자들 이 한마디 말에 머쓱해졌나. 아니면 그거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 괜한 헛소리 했노라 주저앉은 걸까.

 

죽음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살아온 모습대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놓이다. 오만과 위선으로 살아온 생애를 추한 노년으로 마감한다면 그 적나라함을 어찌 견뎌내겠는가. 겸손하고 신심하게 잘 살아온 사람의 마지막 모습의 힘든 것은 다른 세상의 안위를 위해 미리 치르는 보속이라 여길 수도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살아온 모습과 상관없이 불공평한 것이 다행이다.

 

내 마음 같아선 악한 자에 너그럽고 선한 자에 가혹한 세상에 분개하고 싶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이토록 순하고 너그럽다 못해 어질기만 하다. 천성 또한 그러 하겠지만 꽤 많은 시간과 수양의 공력이 아니곤 힘든 일이다.

 

인간 최대의 욕망은 오래 사는 것일 거다. 진시황의 불로초, 젊어지는 샘물, 만병통치 불사약(不死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개발되며 끊임없는 인간구추의 대상이며 영원히 식지 않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나는 마리네티의 미래파를 생각한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오래 꿈꾸어 오던 인간 육체의 금속화 과정의 시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의 선언문은 현실화 되었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와 자동차가 있고 여객기와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이 속도전의 끝까지 왔으며 도시 건축은 그들이 꿈꾸던 신소재 ― 철강과 유리로 말끔히 단장되었다.

그의 선언문 중에서 현실화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전쟁의 미학과 여성에 대한 경멸, 도서관과 박물관의 수가 그 때보다 더 많이 세워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여튼 이 미래파의 강령처럼 과학의 급진적 발달로 인간의 수족은 금속화 되었고 장기(臟器)마저 인공이 가능해졌다.

 

흥미를 자극하는 제목 때문에 집어든 『평균수명 120세 축복인가 재앙인가』를 읽으며 난 ‘재앙’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누군가 의사에게 요즘은 왜 아픈 사람이 많으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 살아서요.”

 

아주 간단명료한 답이다.

 

내 나이 60이 넘었다. 할아버지, 아버님이 60을 넘기지 못하셨으니, 당연히 할아버지, 아버지 앓아보지도 못한 관절염, 손발 저린 병, 고개 뻑뻑한 병, 소변 시원찮은 병, 돋보기 써야 보이는 병, 이미지는 떠오르는데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고 터져 나오지 않는 병…, 이런 병 직사하게 앓으며 살아야 조상님들과 형평이 맞아 떨어질게 아니겠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병들 다스리자고 재산 축내는 일이다. 올 여름 존엄사인지 자연사인지. 그거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안 기둥뿌리 몇 개는 축내고 가는 건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탤런트 이순재가

 

“죽어 자손에게 1,000만 원 정도 남겨주고 가는 게…”하는

 

광고방송의 장례 보험이라도 들어 놓고 볼까 생각 중이다. 그런데 이걸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도 아니다. 5060텐포족이 10시에 대형서점으로 출근해 오후 4시까지 열독(熱讀)하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몰려다니는 노인들이 선거판이 벌어지면 그거 무시할 세력이 아니다. 언젠가 대통령 선거전에서 아버지 어머니 선거는 관두고 놀다 오시라고 투표를 고의로 못하게 한 적도 있잖은가. 이게 서서히 정치세력화 할거다.

 

의료시설은 갈수록 좋아져 소머즈, 600만 불의 사나이가 늙은이로 대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여주 작은 읍 단위 도서관에 노인층 독서층이 형성되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볼 일이 아니다. 그들에겐 인생 5, 60년 이상의 연륜이 있고 전문화된 두뇌가 있으며 인륜과 정의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안목이 있고 …노장과 니체와 프로이드와 디오니소스와…, “아 그런 거 다 읽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거대 괴물이 어디로 튈까.

 

앞으로 삶이 좋아 진다 해도 내 소행머리로 봐서 9988은 언감생심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에 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에 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내 몸이 내 소망을 배반하고 노욕에 빠질지도 모른다. 오십이 넘으며 느는 게 배짱과 가당찮은 욕망인 것을 보면 노추에 들기도 쉽겠다.

 

작가는 이렇게 온갖 사치와 욕망 털어내고 낙목한천 홀로서서 노추를 근심한다.

 

그러나 실상 작가나 우리가 쉴 새 없이 닦고, 조이며, 기름칠해온 인생 ‘늙어 누구에게 폐를 끼칠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늙어 누구를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지. 그래야 심청전, 장화홍련전이나 읽는 노친네가 아닌 밀란쿤테라, 보르헤스를 넘보는 명실상부한 신세대 거장들이 아닌가.

 

작품을 뒤집어 읽었다.

 

죽어가는 방법. 죽어가는 장면들, 죽어가는 순간의 심리, 늙어가는 남녀 성별의 차이, 죽어가는 몸과 정신의 이격거리, 죽어가는 사람의 병수발로 치러지는 후유증, 죽어가는 과정의 담론, 죽어가는 방법의 미래상, 죽어가는 인간군상의 변모 과정 등등.

 

평에서와 같이 나는 내 생각만 고집하지 않는다. 작가와 또 다른 면을 들춰냈을 뿐이다. 텍스트 전면에 흐르는 아름다운 인간애의 원천은 마르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이기를 고집하는 휴머니즘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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