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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구역 / 신정민

5구역 신정민 은밀한 데이트 장소로 공동묘지만한 곳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후회와 함께 시작된 사랑은 묘역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곁에 있어 들을 수 없었던 속삭임이 있었다 묻힌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죽음의 트럼펫 소리 누군가 오래도록 데니보이를 연습하고 있다 말이 필요 없는 데이트 모르는 자의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는 햇살들 인생은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웠다 우리는 결국 모르는 사이 잊지 못할까 봐 잊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서 종종 만나곤 했다

시 - 필사 2021.12.14

사랑은 끝이 없다네 /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마음속을 걸어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어떻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별로 타오른 우리의 사랑을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로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까지 어찌 지금의 네 것이겠는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가만히 눈감으면 상처 난 내 가슴은 따뜻해지..

시 - 필사 2021.12.1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시 - 필사 2021.12.14

짧은 수다 / 노정숙

짧은 수다 노정숙 생텍쥐페리는 감탄을 잘하는 행복한 아이였대요. 인생의 역경이 그를 지각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항공로가 그를 작가로 만들고, 유배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대요. 영웅 이상으로, 작가 이상으로, 그의 착한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어요. 착한 마음이 늘 꿈꾸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하잖아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마음에 희망을 잃는 것이지요. 폐허가 된 촌락, 이산가족, 죽음…. 이런 것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파괴라고 알려주었어요. 감탄을 잘하는 생텍쥐페리는 우리를 무시로 경이로운 세계로 데려다주지요.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불운’이 무엇인가 느껴져요.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비평가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는 것으로 비평가들에게 반감을 샀지요. 시대를..

개의 시간 / 임이송

원주에 자리잡은 임이송 작가의 소설책이다. 강릉문화재단과 강원도에서 기금을 받아 묶었다. 20여년 전, 수필반 인연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마음으로 애틋하다. 드문드문 전해온 그의 소식에 안타까움이 많았다. 잘 건너와 이제 평온한 듯하여 고맙다. 그 격랑의 시간이 소설을 쓰게 했나 싶기도 하다. 주변에 '진국'이라고 말하는 몇 사람 중에 꼽는다. 언제든 그를 만나면 든든한 보양식 같은 걸 먹이고 싶다. 그리고 게이샤 커피가 아닌 보양차로 속을 채워주고 싶다. 말미에 있는 을 먼저 읽어서인지 자꾸 수필적 시선으로 읽게된다. 밀도있게 잘 엮어서 단숨에 읽힌다. 박수를 보낸다. 반려동물 화장장에서 시작하는 , 말로만 듣던 생소한 풍경을 자세히 본다. 대를 잇는 고난 속에서 같은 마음결을 가진 사람이 사랑..

놀자, 책이랑 2021.12.12

오우가 - 라라테이블

오우가 모임을 라라테이블에 예약했는데, 코로나19 확진자 7천명이라서 자임네 집에서 모였다. 코다리찜을 시키고, 고기를 구웠다. 새로운 양배추김치 덕에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모처럼 폭식에 왕수다 ~~ 뉴욕서 사온 커피와 팬티 선물도 받고 옷 나눔도 했다. 늘 푸짐하게 들려보내는 친구 자임, 잘 사는 모습을 따라쟁이 해야한다. 저녁에 잠깐 짬이 났다고 아들 며늘이 왔다. 예약 취소했던 '라라테이블'을 갔다. 저녁은 처음 온 건데, 점심보다 널널하다. 남편은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늦게 나와서 못 찍었다. 네 명이 다섯 그릇을 싹 비웠다. 이곳은 아직 모두 맛 있 다. 며늘에게 내가 만든 무효소와 고구마스프를 들려보내니 뿌듯하다.

또 하나의 조선 / 이숙인

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을 기록했다. 52명을 소개하려니 행적을 위주로 한 짧은 서사다. 미루어 짐작하고 그려볼만한 여지가 많다. 여자의 삶은 오로지 배경으로만 허용했던 시대에 빛나는 그녀들이 있었다. 여종부터 왕비에 이르기까지. 10대 소녀에서 여든 할머니까지. 조선시대 역사의 또 다른 공간을 장악했다. 세속적 의미로 성공은 못 했지만, 도도히 흐르는 인간 근원의 힘을 만난다. '앞선 여자'들의 의식이 다음 세대들의 길을 열어준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뼛속에 사무치는 억울함은 여자로서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일이다.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쳐 스스로 목을 매거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은애는 불과 18세밖에 안 된 여자지만 억울함이 사무쳐 한..

놀자, 책이랑 2021.12.09

노천탕에서 / 노정숙

노천탕에서 노정숙 마을버스 은수랑 두 번째 여행 중에 학가산 온천을 들렀다. 안동시에서 만들었다는데 깔끔하고 쾌적하다.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갔다. 넓은 탕에는 두 어르신이 앉아 있다. 서로 어디에 사느냐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 다 안동의 종손며느리로 연륜이 곱게 내려앉았다. 한 분이 손을 내밀며 화려한 네일아트를 자랑하신다. 딸이 생일선물로 해줬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하신다. 고우시다고 한껏 칭찬을 해드렸다. 곁에 계신 갸름한 얼굴의 친구 분은 예쁜 건 다 지나갔고, 아픈 곳이나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1900년생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스 닐은 80세에 옷 벗은 자화상을 그렸다.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평론가들은 흰 천이 ..

성남문예비평지 <창> 13호

오랜만에 민예총 사무실에서 발송작업을 했다. 사람이 그리워서 불렀다는 말이 짠하다. 코로나19는 이렇게 사람과의 소통을 경계해야 하니, 사람이 귀해지는 건가. 10시에 만나 작업을 하고 점심 먹고 와서 마저 작업을 하고... 젊은이 둘과 중젊은이 둘, 그리고 나. 올해는 을 한 권으로 마쳤다. 광주대단지 사건 (광주민권운동)을 주 안건으로 다뤘다. 옛 성남의 현장 사진과 인터뷰를 통해 그 시절을 돌아봤다. 1971년, 강제이주 사건에서 비롯한 문제들을 가까이 보니 참담하다. 그늘에 있던 사건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위로의 마음이 절로 든다. 척박했으나 끈끈했을 인정을 떠올리는 것도 사치로 느껴진다. 그들의 비통에 공감한다. 어쨌거나 잘 지나왔다고 .....

놀자, 책이랑 2021.12.07

호시절

친구 자임이 뉴욕 전시를 마치고 왔다. 두 번의 코로나 검사,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아서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남편들과 함께 만나 어가일식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를 찾았다. 아늑하니 분위기가 좋다. 이쪽 식당가에 찻집이 없던 차에 반가웠다. 올 5월에 오픈했다는데 벌써 입소문이 났나보다. 손님이 많다. 호시절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렇게 운전할 수 있고, 내 발로 걸어다닐수 있을때까지를 호시절로 삼기로 했다. 너무 소박한가. 그럼에도 힘이 난다. 어쨌거나 아무일 없는 일상을 기적이라 여기기로 했다. 모두 감사, 감사다. 저 그림 속처럼 자유롭게 북적일 시간이 올까. 확진자가 5천명이 넘었다. 불안감을 넘어서야 '함께'인 건데... 친구의 선물로 돋보기 부자가 되었다. 이건 몇 해 전 파리에서 사다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