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수다
노정숙
생텍쥐페리는 감탄을 잘하는 행복한 아이였대요. 인생의 역경이 그를 지각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항공로가 그를 작가로 만들고, 유배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대요. 영웅 이상으로, 작가 이상으로, 그의 착한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어요. 착한 마음이 늘 꿈꾸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하잖아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마음에 희망을 잃는 것이지요. 폐허가 된 촌락, 이산가족, 죽음…. 이런 것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파괴라고 알려주었어요. 감탄을 잘하는 생텍쥐페리는 우리를 무시로 경이로운 세계로 데려다주지요.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불운’이 무엇인가 느껴져요.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비평가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는 것으로 비평가들에게 반감을 샀지요. 시대를 앞 선 그의 작품은 당대에 평가받지 못했어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의 혼란과 상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연애, 고갱과의 우정도 고통이었지요. 자신이 ‘개’와 같은 존재라고 느끼게 하는 가족과 편견으로 가득한 상처투성이 기억과 고통 안에서 쌓여진 그의 작품은 자신에게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했잖아요. 물감 살 걱정과 캔버스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았죠. 위대한 일이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작은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네요. 권총 자살을 하기까지 동생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썼어요. 지독한 가난 속에 고독한 나날이었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있잖아요. 전통 철학의 폐기를 주장한 이단아래요. 스승인 러셀은 자신이 가르친 것보다 제자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했지만 말예요. 두 권의 책을 냈는데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낸 자신의 책에 대한 비판서고요. 서로 상충하는 이론은 난해하다는 평으로 호기심을 자극하지요. 음악과 건축에도 천재성을 보인 그는 직업 철학자로서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철학에 방해가 된다고 막대한 유산을 형제에게 나누어주고,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6년간 했대요. 연구기간 동안은 자연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고요. 자신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대요. 끝까지 완벽주의자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하긴 지금까지도 그의 주장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예요. 이해하지 못하는 이론에 대한 경외심일까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신비롭다고 하지요. 그는 “신비한 것은 세상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존재 자체가 준엄하다는 뜻이겠지요.
베토벤은 웃음소리가 나빴대요. 직접 들어보지 않은 이 말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기쁨도 습관이지요. 기쁨을 자주 맛보지 못한 사람의 웃음소리겠지요.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 되었대요. 그는 11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귓병이 점차 악화된 데다가 화를 잘 내는 습성이 겹쳐 점점 빈 음악가들과 관계가 나빠졌지요.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오기가 힘들었겠죠.
〈입맞춤〉마저도 기괴하게 그린 뭉크는 있잖아요.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고,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죽었대요. 누이동생은 정신병원에 있었고, 그도 몸이 약했대요. 그러니 뭉크는 늘 삶 가까이 있는 죽음을 응시했지요. 죽음을 그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그는 그 시절 장수에 속하는 80세에 죽음을 맞이했대요. 현대에 와서는 음울한 그의 그림이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 쓰인다고 하잖아요. 자신의 마음속을 그림으로 만났을 때 환자는 평온을 느낀다고 하네요.
오래전에 가 본,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 지하에는 그가 그렸던 소품과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더군요. 그림 안에 있는 소품을 실제로 보면서 시간을 건너뛰는 느낌을 받았어요.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지만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영원히 살아있는 뭉크를 만났지요.
상처에서 피어낸 꽃이든 행복한 기운의 전염이든 앞 세대의 세례를 받으며 우리는 달려왔어요. 저들이 퍼트린 웃음에 안도하고, 눈물과 피로 자아낸 작품들을 보며 힘을 얻고 풍요로워졌지요. 그들의 예술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도 연민과 위로와 감동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밀고 나아갔어요. 부산스러웠던 마음과 몸이 자연스레 슬로비디오로 움직이는 시간에 와 있어요. 이제 모든 걸 줄여야 할 때가 되었지요. 수다마저도 짧아야 눈총을 피할 것 같아서요. 가끔은 눈치 없이 긴 수다를 풀어놓던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수필과비평> 2021년 12월호 (통권2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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