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 원과 5만 원
노정숙
조*자 님이 문우 셋과 만났다.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꾸 두리번거린다. 홀 서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을 부른다. 다정한 말씨로 “내가 지금 이곳 사람들을 살펴보니 자네가 참 열심히 일을 하네. 자네는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걸세.” 대강 이런 말을 하며 신권 5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한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항상 5천 원짜리 신권을 얼마간 준비해서 다닌다.
전에는 운전을 했고, 한동안은 기사를 대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외출이 잦지 않으니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70대 그의 배낭 안에는 늘 선물이 가득하다. 특별한 떡이나 참기름, 양말 등 만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넣고 나온다. 팬데믹이 있기 전, 문학행사에도 그냥 가는 법이 없다. 장갑, 덧신, 향초, 비누 같은 소소한 물건들을 준비해서 유머퀴즈와 함께 나누며 회원들을 즐겁게 한다. 작년 겨울에는 내복 80벌을 주문해서 주변에 나누어주었다.
감사할 일 많은 일상이 모두 간증干證거리라며 소프라노로 웃는다. 말은 없어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하는 느낌이 후광으로 번진다. 취미생활이 나눔인 그의 삶이 수필이다.
김*순 님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따뜻한 점심을 차려드리러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달려가곤 했다. 그 짱짱하던 어른들이 요양병원을 거쳐, 요양원으로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제 60대가 된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건 손주들이다. 주말마다 두 아들의 손주 네 명을 돌봐준다. 4살부터 9살까지 손주들은 안 되는 게 없는 할머니 댁에서 맘껏 논다. 아이들이 오면 앉을 새 없이 바쁘지만 언제나 환한 얼굴이다. 손주들의 피어나는 기운이 원적외선 이상의 효능이 있다며 자랑한다. 평일에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재바른 몸에 바람소리가 난다. 오래 이어온 익숙한 일상이다.
그녀는 동네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를 자주 만나는데 늘 마음이 쓰였다. 어느 날 할머니 뒤를 따라 걸으면서 5만 원권을 접어 살짝 구겨서 “할머니 이 돈 떨어뜨리셨어요.” 하고 불러 세운다. “내 돈 아녀요.” “떨어진 돈이니 할머니 가지셔요.” “아, 고마워요.” 5만 원 권이 할머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돈을 이동시킨 김*순 님은 스스로 아직 쓸 만한 ‘잔머리’라며 즐거워한다. 수줍음 많은 그녀는 몸으로 시를 쓴다.
깨끗한 5천 원과 구겨진 5만 원이 자꾸 내 마음을 휘젓는다. 선행과 봉사, 나눔이 취미인 이들은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하다. 그러나 넉넉하다고 모두 나누며 사는 건 아니다. 주머니 사정보다 마음이 더 부자인 사람도 많다. 기초수급자 노인이 일 년 동안 모은 돈 20만 원을 연말에 춥게 지내는 이웃을 위해 내놓는다. 고물을 수거하는 분은 검은 봉지에 천만 원을 불우이웃을 위해 익명으로 기부한다. 나누지 않고 세습되는 부富, 만족감 없는 부에 행복이 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그 세계가 궁금하다. 경제력과 마음이 함께 부자인 사람은 복되다.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 때, 그것만으로 내 일을 다 한 것이라 여겼다. 호시탐탐 내 시간을 챙기면서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두 분 다 하늘나라로 이사를 하셨으니 당당하던 내 일거리가 없어진 셈이다. 세끼 식사 준비를 하지 않고, 어른을 뵈러 찾아오는 손님도 없으니 도무지 할 일이 없다. 마침 남편도 퇴직을 하고 청소를 도와주니 내 시간이 널널하다. 그야말로 온통 여유만만이다. 남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한가롭게 살았단 말이지.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나를 ‘기특하게, 대단하게 혹은 불쌍하게’ 본 것이구나, 당연했던 일상이 보속補贖으로 여겨지니 되레 고맙다.
그런데 뒤늦게 얻은 나의 완벽한 자유가 흔들릴 때가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조*자 님이나 김*순 님을 만나고 온 날은 흐뭇하면서도 마음이 가렵다. 이 근질대는 마음은 참으면 가라앉을 수도 있지만 긁으면 상처가 난다. 상처가 두렵긴 하지만 나도 무언가 좀 해야 하는가 하는 갈등이 머리를 치켜든다. 일찍이 남편한테 잔머리 없다고 핀잔 받은 나는 또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할까. 깨끗한 천 원짜리나 만 원권을 준비해서 두리번거려야 하나. 유혹과 채근이 엇갈린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런 어여쁜 사람들을 글 동네 아니면 어디서 만나겠는가. 아무렴, 이들은 내 마중물이자 죽비다.
<에세이문학> 2022년 봄호 (통권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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