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을 기록했다.
52명을 소개하려니 행적을 위주로 한 짧은 서사다. 미루어 짐작하고 그려볼만한 여지가 많다.
여자의 삶은 오로지 배경으로만 허용했던 시대에 빛나는 그녀들이 있었다. 여종부터 왕비에 이르기까지. 10대 소녀에서 여든 할머니까지. 조선시대 역사의 또 다른 공간을 장악했다. 세속적 의미로 성공은 못 했지만, 도도히 흐르는 인간 근원의 힘을 만난다. '앞선 여자'들의 의식이 다음 세대들의 길을 열어준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뼛속에 사무치는 억울함은 여자로서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일이다.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쳐 스스로 목을 매거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은애는 불과 18세밖에 안 된 여자지만 억울함이 사무쳐 한 번 죽음으로써 결판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헛되이 죽을 수 없었다. 칼을 꺼내 들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가 통쾌하게 설명하고 꾸짓은 뒤 마침내 찔러 죽임으로써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저 원수는 복수를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온 고을이 알도록 했다. 사람으로서 윤리와 기질이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 은애의 행위는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수 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
<일성록> 정조 14년 8월 10일
국왕 정조가 김은애의 행위에 주목한 것은 성범죄의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만연했던 시대에 용기와 기백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코자 했다는 데 있다. (211쪽)
역시 멋진 정조대왕, 내가 우러르던 남명 조식 선생도 음부를 관아에 소송한 사건에서 소문의 진원이라는 지목을 받아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여자의 몸을 나라가 관장하던 시대다.
* 정축년 변란 초에 실절한 부인을 저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절을 가르친 것입니다. 법을 의롭게 재정해도 악용될까 걱정인데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드니 어찌 백성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장선정의 집에 실절한 부인의 소생이 있는데 상신이 그와 혼인을 의논햇다 하니 추잡함이 막심합니다.
- 송시열, <기축봉사>
(226쪽)
나라가 힘이 없어 부녀자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을 돌을 던진다. 잡혀갔다 돌아온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은 몸을 더럽혔다는 의미, 정절이 의심된다는 말이다. 뿐만아니라 10여 년 도태된 속환녀를 추적하고 그이 자손의 앞길을 막는다.
* 집안일의 지식화, 이빙허각
이 모두가 양생하는 선무요, 치가하는 요법이라. 진실로 일용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요. 부녀가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 <규합총서서>
'밥이나 하고 옷이나 만들던' 여자들의 일을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이가 바로 빙허각이다. 우선 그녀는 삶의 현장에서 한시도 놓칠 수 없는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을 일정한 체계로 분류하고 범주화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여자의 일'이 그녀로 인해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이 되고 지식의 내용이 되었다. 조선 후기 여성지성사를 저술한 이혜순은 빙허각의 지식에서 세 가지 특성을 밝히는데, 그것은 직접 실험의 중시, 고전 지식의 시비 판단, 일상 경험의 지적 전환이다. (301쪽)
'놀자, 책이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이동순 (0) | 2021.12.16 |
---|---|
개의 시간 / 임이송 (0) | 2021.12.12 |
성남문예비평지 <창> 13호 (0) | 2021.12.07 |
검은솥 / 박연희 (0) | 2021.12.04 |
색채론 / 괴테 (0) | 2021.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