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늦깎이 수필가다.
일면식 없는 작가가 왠지 가깝게 느껴진다. 안동의 옛모습과 토속음식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동시대 사람이 아닌 듯, 먼먼 옛시간으로 이끌린다. 일찌기 '텅 빈 충만'을 익힌 듯한 마음을 따라 흐른다.
그럼에도 "세상에나~~ 이런 시절을 어찌 살아냈을까." 자꾸 탄식한다.
초저녁에 잡은 책을 단숨에 다 읽고야 자리에 들었다. 가독력이 좋다.
스며드는 진정성 때문이다.
* 유월이
걸음을 멈췄다. 눈길을 잡은 것은 '유월이 집'이라는 글씨다. 길가에 세워진 허름한 봉고차 옆면에 적혀있다. 가던 길을 쉬 가지 못하고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집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커튼이 쳐져 있어 틈새로 들여다보니 읽다가 펼쳐놓은 책들이 보인다. 내가 늘 꿈꾸는 움직이는 집이다. ......
더위가 일찍 찾아온 유월의 장터이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사거리의 한 모퉁이에서다. 그녀는 난전에서 좌판 위에 작업복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손님들이 그녀을 유월이라고 불렀다. 집에 와서도 유월이 집과 그녀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녀는 나같이 집에 매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32쪽)
*돌이 뚫은 집
돌이 집을 뚫었다. 태풍이 온 날, 거센 바람에 돌 하나가 우리 집벽을 뚫고 들어왔다. 흙벽 집은 동그란 돌로 구멍이 났다. 태풍이 지나가고 윗방에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가 원래의 자리인 것같이 내 머리만 한 돌이 앉아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이들은 돌이 날아 들어왔다고 좋아했다. ....
돌이 낸 구멍은 흰색 한지로 발라 동그란 들창이 되었다. 달이 밝은 밤에는 창에 달빛이 비쳐 불을 켜지 않아도 어둡지 않았다. 은색의 돌도, 들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창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빛으로 윗방은 신비스런 감마저 들었다. 한지를 붙여놓은 창문은 우리의 등불이었고, 흙집의 힘든 생활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주었다. (64쪽)
* 난 화분
.... 매일 닦아주는 난 화분은 반짝 빛났고, 난 대신에 제라늄을 담고 있지만 난 못지않게 예쁘고 품위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서 벽에 붙이기도 했다. 제일 처음 산, 꽃말이 우울함인 멜랑콜리는 튼튼하게 잘 자랐다. 나도 우울증인지 구슬픔인지는 도망가고 없고, 뭔가 모를 자신감도 생기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가만 내 꼴을 보니 엉망이었다. 난 화분에 제라늄 키우는데 너무 빠져 외출도 잘하지 않고, 친구들과 수다도 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큰 결심을 했다. 평상시에 내가 키워놓은 제라늄을 부러워하던 아파트에 가족처럼 지내는 분들께 하나씩 드렸다.
그날 밤 텅 빈 베란다를 보고 다시는 뭔가를 채우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169쪽)
마음으로 꽃바구니를 한아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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