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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장석주

시력 50년 장석주의 시선집, 고급진 장정이다. *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이른 나이에 시에 노출된 환경 탓이었을까. 외톨이 소년의 외로움 탓이었을까? 나를 시로 이끈 것은 내 안의 뾰족하게 내민 우쭐한 기분이거나 사춘기의 영웅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시가 내 차가운 이마를 콕 찍어 호명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내 안에 시의 싹이 조그맣게 돋아났으니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었다. 시는 눈썹, 광휘, 계시이다. 시는 늘 걸음이 빨라 나보다 앞서갔다. 저만큼 앞서가는 시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며 꾸역꾸역 시를 썼으나 시에 목숨을 건 듯 살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삶으로 시를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은 듯하다. 그동안 시가 내 몸을 관통하고..

놀자, 책이랑 2021.12.26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 / 배혜경

배혜경 작가는 일면식 없는데 벌써 네 번째 책을 읽는다. 첫 수필집 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탄탄한 지식과 적당한 감성이 잘 어우러져 가독력이 좋다. 거듭 읽을 것 같다. 박수보낸다. 영화는 가성비 높은 종합예술이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즐길 수 있으니 감사, 감사할 장르다. 대중화의 기술 발전은 이렇게 인류에 이바지한다. '수필가 배혜경이 영화와 함께한 금쪽같은 시간'의 결실이다. 내가 본 영화보다 못 본 영화가 많지만, 저항없이 그의 안내에 따라간다. '긴 프롤로그'부터 '짧은 에필로그'까지. 좋은 영화를 많이 소개받은 듯, 든든하다. 가족이야기가 살짝 어우러저 정감 있다. 쿨한 듯 이야기하지만 속살이 촉촉하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극장에 몇 번 못 갔다. 관객이 드문드문 앉..

놀자, 책이랑 2021.12.24

만남과 소식

오랜만에 올가정원에서 4인이 점심을 먹었다. 자주 보는 3인과 오랜만에 보는 1인, 그 1인이 포이세티아 분 3개를 가져왔다. 마침 작은 빈 화분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심었다. '한 달 기쁨'이라며 건넸는데... 한 달이라도 잘 볼 수 있기를. 거의 20년 넘게 본 그는 여전히 '아가씨' 같은데 정년이 6개월 남았단다. 내년엔 책을 묶으리라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공표를 한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공통의 숙제를 끙끙거리며 달고 산다. 서로 애틋해하면서. 오늘 이야기는 어찌 정치권에 대한 게 많았다. 주변에 극한 발언을 하는 아니 극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정치에 신경을 써야하는 건, 그들 중 가장 형편없는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왕조시대..

죽음을 배우는 시간 / 김현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을 의사가 알려준다. 내가 평소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과 겹치는데, 그는 의사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크다. 또 용기있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같은 업의 종사자나 사용자에게 눈총받을 수도 있는 사항들이다. 늙고 병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병원을 가지 말라는 말이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행해지는 의료행위를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소생의 상징인 심폐소생술의 실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연신 끄덕이며 읽었다. 딸들에게 전하는 자신의 로 마무리한다. * 14세기 흑사병 창궐 이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죽음의 춤'이라는 도상에서 의사들은 별 볼일 없이 소변통 하나 들고 죽음에게 끌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현대..

놀자, 책이랑 2021.12.20

피가지변(皮哥之辯) / 피천득

피가지변(皮哥之辯) 피천득 ‘皮哥가 다 있어!’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皮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두터운 전화번호부에도 皮가는 겨우 열이 될까 말까 하다. 현명하게도 우리 선조들은 인구 소동이 날 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산아 제한을 해왔던 모양이다. 皮가가 金가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간다 사람에게는 닥터 김이나 닥터 피나 다 비슷하리라. 그래도 왜 하필 皮씨냐고? 옛날에 우리 조상께서 제비를 뽑았는데 皮씨가 나왔다. 皮가도 좋지만 더 좋은 성(姓)이었으면 하고 다시 한 번 뽑기를 간청했다. 그때만 해도 면 직원들이 어수룩하던 때라 한 번만 다시 뽑게 하였다. 이번에는 毛씨가 나왔다. 毛씨도 좋지만 毛는 皮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아까 뽑았던 皮를 도로 달래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대대로..

산문 - 필사 + 2021.12.17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이동순

종가의 종부 이동순 선생님 오래전, 분당수필 강의실에서 만났던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고운 눈매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도 종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여러 시속에 관한 글을 썼다. 어제 수업 중에 오셔서 책만 두고 갔다. 잠깐이라도 만났으면 더 좋았을걸... 집에 와서 담숨에 읽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다. 맺힌거, 꼬인 것 없는 순수한 삶에 킥킥 웃음도 났지만, 후반부에 큰 시련도 잘 이겨내고 있다. 해학과 함께 잘 읽히며 가슴 저릿한 성찰에 이르게 한다. 2011년 남편의 루게릭병 발병은 의사들이 5년을 기한 잡았지만, 지금까지 잘 이겨내고 계신다. 부군의 기적 행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빈다. 장하다. 이땅의 종부로서 잘 살아낸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내가 선물받은 네잎크로버의..

놀자, 책이랑 2021.12.16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 김진악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김진악 골계이론 뒤돌아보기 1960년대 우리나라는 웃음의 땅이 아니고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이었다. 그 암울한 시대에 태평하게 수필을 논하고 웃음을 말한 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윤원호 교수였다.(이하 경칭 생략) 그는 논문 을 이화여대 80주년 기념논문집(1966)에 발표하였다. 순 한글로 제목을 붙인 이 글은 수필문학과 여러 갈래의 웃음과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논문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1950년대 후반, 학계에서는 여러 학자가 참여하여 골계의 본질을 따지는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정립한 골계이론이 그 후 문학작품의 골계성을 연구하는 이론의 전범이 되었다. 아마 윤원호는 그들이 논의한 웃음의 논리를 수필작품에 적용해보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였다..

산문 - 필사 + 2021.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