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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 슈테판 헤름린

저녁노을 - 슈테판 헤름린 1 진정 즐겁게 산보하고자 하는 이들은 태양을 마주보고 간다고 오린 노래했다. 우리가 인(Inn)강 다리를 건널 때 태양은 동쪽 산등성이에 맞닿아 있었다. 넓고 끝없이 긴 계곡의 가운데께에 있는 다리 위에서 나는 선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한 순간 마냥 정지해 있었다. 빠르게 흐르는, 회색빛이 감도는 초록색 강물 바닥에서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송어떼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계곡이 끝나는 저 멀리 남쪽의 산을 쳐다 보았고, 그 산을 나는 나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영원히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라 마르냐. 그리고 그 높이 있던 하늘, 그건 얼마나 아득하였던가. 그때 그 하늘이 어쩌면 그토록 고요할 수가 있었는지, 아직도 구름이 엉켜질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

놀자, 책이랑 2009.12.28

일 년에 한 번 가는 그곳,

송년모임에 못 나갔는데, 모두 헤어지고 내가 나올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몇몇 의리맨들 때문에 저녁을 차려드리고 나갔다. 태경이 눈을 속이고. (내가 지 엄마인줄 아는지 나만 나가면 녀석이 운다) 반가운 얼굴들과 주인이 추천하는 안주에 소주, 맥주를 마시고, 2차는 라이브카페에 갔다. 70,80 이라나, 첨 간 곳이다. 손님이 없어 썰렁하고, 시원찮은 가수를 제치고 후배가 '연극이 끝난 후'를 멋지게 불렀다. 양주 한 병을 비우고 연례행사로 가는 나이트클럽엘 갔다. 그야말로 돋대기시장같은 분위기다. 음악은 고막을 위협하고, 그곳에서 대화라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전주가 있었던 일행은 아마도 나보다 더 취한 상태일 것이다. 올해는 취하지 못하고 넘어가는가 했다. 광란까지는 아니라도 알딸딸 취해서 귀가 얼얼한 소..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고대 세계를 관찰하다 보면, 흔히 질병이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도구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의 심판은 특정 공동체에게 향해질 수도 있었고, (『일리아드』의 제 1권을 보면, 아가멤논이 크리세스의 딸을 유괴한 테 대한 징벌로서 아폴론은 그리스 군이 역겹에 걸리게 만든다. 『외디푸스』에서는 죄를 범한 외디푸스 대왕의 존재 자체가 신성을 모둑하는 일이었기에 테베에 역병이 돈다) …… 정신은 육체를 배반하는 법이다. 1917년 9월,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결핵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내 머리와 폐가 뭔가 합의를 한 것 같다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육체가 자신의 감정을 배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년의 만이..

놀자, 책이랑 2009.12.24

골무 / 이어령

골무 - 이어령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 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

산문 - 필사 + 2009.12.16

나, 중심

어르신이 전화를 했다. 얼굴 보여야 할 행사에 얼굴을 못 봤다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외할머니가 되느라 그랬다니까 한~참 설교를 하신다. 사랑에 절제가 필요하며, 특히 자식에 대해서 맹목적인 우리나라 여자들이 경계해야할 것이 자식사랑에 대한 절제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몇 달 외국에 다녀올 것이라며 다녀와서 만나자고. 해줄 말씀이 많으시단다. 할머니 노릇때문에 이 한 달, 내 생활이 엉망이 된 건 사실이다. 더우기 연말이라 꼭 참석해야할 행사가 많았다. 딸은 놀이방이나 도우미를 불러놓고 나가라고 했지만 모두 포기했다. 나 없이도 행사는 잘 치루어졌지만, 우리 집에서는 지금 내 충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이렇게 내 노동력을 확실하게 필요로 하는 시간이 앞으로 많지는..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 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서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

놀자, 책이랑 2009.12.16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의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일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것은 ‘내면의 일기’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외면일기’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보기로 한다. ……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 중에서 * 매년 1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그의 동부, 호이젠슈탐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에서 기이한 축제가 ..

놀자, 책이랑 2009.12.14

감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아들이 '재미있다'며 두고 간 책이다. 끝부분에 95세인 사람이 썼다는 인용시를 아빠한테 읽어주기까지 하면서. 이런 간 큰 제목을 단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김정운이다. 약간 고수머리에 교복같은 옷을 입은, 좀 작은 키에 구엽게 생긴 사람이다. 절반은 들었던 이야기지만, 연신 피식거리게 만들었다. 인용이 틀린 부분도 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재미는 있다. 챕터 사이에 사진도 그럴듯하다. 독일에서 찍은 건데 시선이 좋다. '감탄은 인간만의 욕구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욕구가 아니다. 개나 소나 가지고 있는 동물적 욕구다. -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지금 딱 꽂히는 대목이다. 어찌 아기들만 감탄을 먹고 자라는가. 인간은 모두 감탄을 원한다. 좀 큰 사람들 ..

놀자, 책이랑 2009.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