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1 4

맹인들의 호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맹인들의 호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맹인들 앞에서 시를 낭송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목소리가 떨린다. 손도 떨린다.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의 시에서 별빛은 위험한 모험이다. 먼동, 무지개, 구름, 네온사인, 달빛, 여태껏 수면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고기와 높은 창공을 소리 없이 날던 매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읽는다 - 그만두기엔 너무 늦었기에 - 초록빛 풀밭 위를 달려가는 노란 점퍼의 사내아이, 눈으로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골짜기의 붉은 지붕들, 운동선수의 유니폼에서 꿈틀거리는 등번호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낯선 여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싶다 - ..

시 - 필사 2022.05.21

공짜는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빌려온 것이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자, 여기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심장은 반납 예정이고, 간도 돌려주기로 되어 있다. 물론 개별적인 손가락과 발가락도 마찬가지. 계약서를 찢어버리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진 빚들은 전부 깨끗이 청산될 예정. 내 털을 깎고, 내 가죽을 벗겨서라도. 나는 채무자들로 북적대는 세상 속을 조용히 걸어 다닌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날개에 대한 부채를 갚으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중. 또 다른 이들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셈을 치르는 중. 우리 안의 세포 조직은 송두리..

시 - 필사 2022.05.21

일요일에 심장에게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일요일에 심장에게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태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네 모든 수축은 마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조각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힘차게 밀어내는 것 같구나.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줘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있게 해줘서. 내가 늦잠을 자지 않고 비행시간에 맞출 수 있게 해줘서. 날개가 필요 없는 비행 말야.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쪽에선 휴일을 코앞에 둔 분주하고, ..

시 - 필사 2022.05.21

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마음이 분주할 땐 시집이 좋다. 시집 열두 권의 선집이다. 옮긴이의 해설까지 500쪽에 가깝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진솔하고 소박한 수상 소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수상 소감의 맺는 말이다.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아무 것도 없다. 시인이 되긴 글렀나 보다. *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놀자, 책이랑 202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