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봄날의 성찬'

칠부능선 2006. 6. 4. 16:10

 

제 5회 시낭송회에 초대가수인 이동원이 북한공연에서 가슴에 꽂혔다는 그곳 유행가

심장에 박힌 사람..... 이라던가.

오늘,

그 단순한 가사의 그 노래가 내 가슴에도 꽂혔다.

자주 보아도 오래 보아도 심장에 남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시 만나도 심장에 박힌 사람이 있다는... 그렇고 그런 가사의 노래를 어쩌면 그리도 절절하게 부르는가.

다시 듣고 싶은 노래다.

가수 이동원의 건재를 확인하다.

 

선운사의 정윤천시인은

뒷풀이에서 압권이었다. 술을 못이겨 잠시 졸기도 했지만

그의 노래도 가슴에 꽂히기에 충분했다.

어쩜 그리 노래를 잘 하세요.

시와 노래는 같은 것이지요. 무덤덤히 말하던 순박한 시인.

그럼........ 시도 좋겠네.

그의 시를 찾으려 가야겠다.

 

 

 

 

 

 

   그리움

 

                                              정윤천

 

 

  원수보다도 용서보다도

  깊은 것

  흉몽의 긴 밤을 허우적거리다가

  뒤척이며 깨어난 새벽녘에

  이마 위에 푸릇푸릇 돋친

  소름과 같이

  온몸으로 으스스 들던

  한기와 같이

  그렇게 차고 맑은 것!

  독약보다 더 어둡고

  쓰라린 것.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정윤천



     마땅히 사랑이라면
     한사코 뒷날의 아침을 예감해야 하는 일이었네
     거기 그렇게 굳세게 푸르러 오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아프게 뿌리 내리고, 쓰라리게 잎자리 튀워야 할
     세월의 무늬 또한 아로새겨볼 일이었네
     하여 사랑이라면
     애써 지워보려고 눈을 감아도
     어찌할 수 없는 想思의 시간은 저 먼저 와서
     가슴으로는 그 사이
     만산의 홍엽같은 속수무책의 물들어 버림이기도 할 일이었네
     때로는, 넘어지고 일어나 그래도 가야만 될
     막막한 밤길의 행로
     소슬한 바람의 발자국 소리 곁에서도
     마침내 뚝뚝 듣던 차디찬 빗소리 곁으로도
     그러나 짐지기로 한 무거운 기약일 수 있겠네
     사랑이라고 이름 지워준 이 火印의 노래는
     지는 꽃잎의 서리 내린 계절에서도
     폭염의 너울 깊은 지친 햇살 아래서도
     반드시 그 하늘은 푸르르겠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그러나 사랑이라면, 함께 견뎌 이룰 수 있는 마지막의 절정까지
     그 길 위에 내몰린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행복한 형극의 먼 길 위에 
     나선 기꺼움이고야 말 일이었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정윤천

 


  毒가시들 사이로 피어난 꽃

  만약에 누군가 내게 그리움에 대하여
  묻는다면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것, 그 작지만 완강한 꽃잎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나마 그렇게 나마

  내 마음의 토로가 되었다면
  딴은 우리 생의 어느 한 꼭지점이
  까마득한 창천의 푸른 상공쯤
  比翼鳥, 퍼덕이는 깃 치는 소리를 내어
  한번은 먼 곳을 향해 날아올라 버려도 좋으리.

 

 

 

 

 

 

 

 

   흰길이 떠올랐다

 

 

                                               1                                      

 

  어떤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훔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땀 한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씩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깊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닢과 손바닥만씩한 헝겊조각들 속에서, 어느 여름날의(사무치게 은성했던 날의) 숲길 앞에 이르는,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랜 전의 먼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 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상사, 그 광휘로움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마을에 흘러들어와 야메로 치과를 열었던...... 시나브로 그는 절반 넘게 죽어서, 궁리 끝에 어른들은 그를 위하여 가짜 상여를 메기로 했다. 상여는 그렇게 마을을 나서, 진짜 장례식의 거릿제쯤에 이르자, 마을의 수당골이 한차례 떠들썩한 치성을 올려주었고, 홑이불에 싸여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그는, 산죽음의 멀고도 가까운 길을 한차례 돌아 나온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에 그는 곧바로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한동안 사람들의 병든 이빨을 돌보다가 마을에서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밀스런 말투로 어른들은 그 일을 일러 想思라고 그랬다.>

 

  내게도, 꽃술 실한 수국 한 송이. 기도처럼 간곡하게 그에게로 드리웠던...... 긴한 마음의 옛 자취. 그러나 그 깊은 자리. 끝내는 혼자만의 화농으로 벌겋게 익었다가 가뭇없이 져야 했던, 만개한 마음 꽃 한 송이.

 

  그래도 기억은, 가끔, 세월의 생살로 까마득히 차올랐을 종창의 흔적 가까이 데불고 가 마음 쓰이게 하면, 상사, 어금니에 마른침이 고이도록 아름다웠던, 비밀한 그 한 말씀.

 

 

 

 

 

  詩는 쓰러지거라

 

 

  희미한 옛 사랑처럼...... 막다른 골목의 저녁 노을처럼...... 한 시절은 그렇게 스러져갔노라고...... 시대의 사랑법도 바뀌었노라고...... 고상한 뒤폼들을 마음껏 구가하며...... 누군가는 새로운 공법의 비급을 좇아...... 오리무중의 장난질을 닮은...... 안개의 서정 너머로...... 홀연히 잠적하였거나, 등돌아 나섰더라도...... 그래도 너의 시는...... 깍두기 한 사발과 콩나물 한 접시...... 뽀얗게 김이 서린 옹배기를 내려놓고 가던...... 국밥집...... 늙은 주인의 손길 아래...... 죽은 살코기와 허연 뼛국물이 이루어놓은...... 혼곤한 국물 속으로......

 

 

   시방, 여기, 이곳과 더불어  

   힘없는, 버림받은, 죽어가는, 온갖 것들과

   더더욱 더불어

 

 

  덜 삭은 김치가닥이 엉겨붙은...... 토사물 질펀한 공중변소 앞에서...... 그 변소 오물을 치우는 물바랜 새마을 모자...... 김씨 박씨 곁에서...... 그들의 왜소하고 쓰라린 등덜미 뒤에서...... 시는 쓰러지거라......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거라...... 아니, 아니...... 코를 쳐박고 엎어져 뒹굴기도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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