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산벚꽃 피었는데 / 조선근

칠부능선 2025. 4. 14. 21:51

오래 전 <한국산문> 행사때마다 멀리서 사진찍던 모습을 보았던 조선근 선생이 등단 20년만에 첫 수필집을 냈다.

글을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았던 일상이라고 할까.

아쉬울 것 없이 환경과 품위있는 가풍과 넉넉한 사랑을 받고도 어린시절 어머니의 부재를 상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가의 말>과 표제작인 <산벚꽃 피었는데>, 제 1회 한국산문문학상을 탄 <아버지의 자전거> 에 작가의 한 생이 모두 그려진다. 참으로 잘 살아낸 신심깊은 큰 사람이 보인다.

임헌영 선생님의 해설 - '3대에 걸쳐 완성된 창작혼의 비의'는 훌륭한 할아버지, 할머니와 좋은 아버지까지, 인물평으로 읽힌다. 사람을 아는 것이 수필의 근본이다. 고고한 혹은 고독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 훌쩍 큰 키에 반듯한 이마, 깎아놓은 배처럼 하얀 잇속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 게다가 나를 향해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 온 모습이라니...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

멋지다 못해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 남성을 아직까지 나는 본 적이 없었다. (57쪽)

* 어둠과 빛이 하나이듯 삶과 죽음도 하나였다. 죽은 이를 잘 보내는 것이 살아있는 이를 보살피는 일이기도 했다. 다섯 살 봄, 몸이 아파 외가에 간 어머니는 외가 선산에 묻혔다. 꽃이란 꽃은 다 피어 먼저 핀 꽃이 질 무렵이었다. 그분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내 어머니의 나라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89쪽)

* 사랑하는 것은 결심이다. 새로운 결심을 했던 그 때가 우리 삶의 전성기였다. 종교 가정 사회 등등, 세상사에 열심을 낼 때였다. 모자란 것을 채우느라 바쁜 시절이었고 덜어내기보다는 무엇이든 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날 이후 다시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내가 그리도 원하고 갖고 싶어 하던 것을 누군가 버렸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아무리 귀해 보여도 쓰임새가 다한 사람에겐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했다고나 할까. 고질이었던 '사는 병'에서 자유로워지니 비로소 사물이 온전히 보였다. (143쪽)

*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는 이블린 홀의 말처럼 내 확신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확신을 인정하는 것이 관용이다. (...)

국제 앰네스티에서 활동하던 큰아들이 기아, 난민, 생태, 환경, 인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