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그림자가 사는 곳 / 김창식

칠부능선 2025. 4. 6. 13:16

행사때 얼굴을 보는 김창식 선생님의 세 번째 수필집이다.

* .... 한 편 한 편에 혼을 담은 치열한 글을 써서 수필 문학이 다른 산문 형식에 못지않은 매혹적인 장르임을 실증하고 싶군요. 삶의 진정성을 토대로 지성(철학성)과 감성 (문학성)이 조화를 이룬 글을 써서 같은 길을 걷는 문우는 물론 일반 독자와도 소통하고 싶습니다.

- 책을 펴내며

작가의 결심처럼 소소한 일상을 토대로 솔직하고 정감있는 작품을 시작으로 다양한 실험수필에 도전했다. 열과 성을 다한 작가의 시간에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 그림자는 혼자 산다. 어디에? 그림자를 내쫓은 빛과 어둠의 경계면에, 아니면 볕도 들지 않는 어둠의 저편 더 짙은 어둠 속에,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협곡의 틈새에. 아니 겉보기에만 그럴 뿐. 그림자는 내가 버린 것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그림자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 날이 오리라. 어느 날 세상에서 모든 언어가 없어지듯, 그렇게. 슬픈 운명을 예감한 그림자의 울음이 들린다.

(14쪽)

 

* 한 달 쯤 지나 병원을 찾았다. 건물 주변 여기저기에 널빤지와 마대 종이 같은 허섭스레기가 널려 있었다. 지게차가 연신 흙더미를 퍼내는데 인부들 서넛이 파헤쳐진 검은 구덩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바람이 일며 흙먼지가 풀썩 날아올랐다. 건물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3쪽)

이상한(?)한 의사를 만나고 항의는 고사하고 그의 의견에 맞춰 소설을 지어내며 의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 독특한 대처법이다. 당연히 그 병원은 문을 닫았다. 황당한 순간을 다스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나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심심풀이 사주풀이를 검색해보니 '48년생: 나대지도 말고 자제하며 일을 벌이지도 말 것'이라고 쓰여 있다. 나 같은 '늙은 쥐老鼠'는 더더구나 그러해야 할 것이다. (63쪽)

좀 놀랐다. 나는 작가가 훨씬 더 젊다고 짐작했다. 조선 시대 효빈잡기에 실린 '노서'에 늙은 쥐는 지혜롭고 욕심이 없다고 했다. 부딪침 없는 사회생활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 나는 안다. 내가 꿈과 그림자, 가상의 세계로 떠나는 동안 아내는 먼 여행 끝 현실 세계로 돌아와 더 이상 잠 못 이루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것을 (104쪽)

<땟목 침대>를 비롯해서 곳곳에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아내 강영복 님과 남은 생이 화평하리라 믿는다.

* 아내는 세상의 모든 아내가 그럴 법도 하지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안 아픈 데가 없다면서도 도통 쉬는 법이 없고 일을 만들어서 합니다. (...) 흐릿한 조명 아래 사이사이 주름이 잡힌 아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습니다. 청바지를 '줄여' 입던 스물네 살 긴 머리 '처녀'의 얼굴을. (202쪽)

*처음에야 누구에게든 사랑의 형상이 시퍼런 깃발처럼 펄럭이고,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기도 하지. 유령처럼.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들더군, 알다시피. 몇 가닥 불씨가 구슬피 저항하다 바스러지더라니까, 불량 과자처럼. (2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