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욜, H 선생에게 산문집을 선물을 받았다.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안희연, 86년생 시인이다. 아프다고, 슬프다고 콧날 찡그리는 모습까지 푸르싱싱하다.
나, 벌써 노인의 시선이 된 듯하다. 홍야홍야~~ 그저 귀엽고 이쁘게 보인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이렇게 많았는가. 주로 외래어로 된 생소한 단어에 걸렸다.
시인이 감수성을 건드린 단어들을 가지고 논다. 궁글리고 까불리고 후벼파며, 때론 달달하게, 결국은 슬프게 닿는 부분이 많지만 촉촉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글이 되는 최소 단위, 단어를 독립시켰다고 해야할까. 자기 색을 입혀 날개를 단다. 색다르게.
많은 책과 영화가 언급되는데 내가 읽은 책은 <수전손택의 말> <어린왕자> , 영화는 <더 디그> 정도다. 애틋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허수경 시인도 반갑게 만났다.
2021년 초판에 2024년 9쇄를 찍었다. 시인의 산문집은 잘 팔리는구나. 다행이다.
뒤표지 추천사에 박연준 시인이 '안희연은 누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라고 한다. 참 맘에 든다. 안희연의 시를 찾아봐야겠다.
시 청탁을 두 곳에서 받아두고 있는데 막막함을 잠시 잊었다.
그래, 나도 어여 내 놀이터에서 사부작거려야겠다.
* 나의 반려식물들로부터도 이따금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온몸이 귀인 식물들이 나를 알고 나를 보고 나를 다 듣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틈만 나면 말을 건다. 아가야, 목말랐지. 아가야, 새 잎 났네. 너는 정말 예쁜 무늬를 가졌단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질색을 한다. (38쪽)
나도 잘 하는 짓이지만 내 곁에서 지청구 주는 사람은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한 남편.
* 팔을 들어 슬픔을 받치고 선 모양. 나란한 두 개의 기둥.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다. 그러니 팔이 아프면 조금 꾀를 부려도 좋아. 오늘은 나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당분간은 내가 받치고 있을게. 손으로 안 되면 발로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그러니까 다녀와.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숲길도 걷다 와, 기다릴게. (101쪽)
친구의 정의가 신선하다.
그런데 내 절친은 나를 믿지 못하고 내게 커피 마시고 오라고만 할 것 같다.
*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 (《수전 손택의 말》) 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 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 테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더 이상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풍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12쪽)
* 첫 시집을 내고 K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는 팟캐스트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시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까마득한 '아가'였을 나에게 K 선생님은 과분할 정도로 예를 갖추셨다. 호스트가 게스트에게 질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혹 말에 찔리면 어쩌나 저어하시며 "뭐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셨다.
(177쪽)
난 이 조심스럽고 겸손한 K 선생님이 김사인 시인 같다. 아님 말고.
오래전 <어린 당다귀 곁에서>을 읊조리던 맑은 느낌의 김사인 시인이 떠오른다.
* 문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슬픔이라고 말하는 대신 복숭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슬픔은 안으로 감추고 복숭아 이야기만 실컷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해진다. 오히려 여리고, 무르기 쉬운 모습이 실감나게 만져진다. (235쪽)
* '끝!'이라 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은 이제 없다. 살아 있는 한 끝은 영원히 유예된다.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 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자로 살아가고 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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