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유리 나기빈 단편집

칠부능선 2024. 11. 25. 00:11

쉽게 읽혔는데 뒷끝이 있다. 아니, 여운 때문에 자꾸 생각을 궁글리게 된다.

인간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미진한 확신과 혼란으로

마구 흔들리는...

유리 나기빈은 1920년 모스크바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버지 친구와 결혼해서 그의 아들로 입적했다. 그러나 그도 유형을 떠나고 나기빈의 계부가 된 작가 야코프 리카체프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의대에 입학했으나 포기하고 소련 국립영화대학에 재 입학, 1940년 첫 단편을 쓰고 등단한다.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쟁을 치르고 후에 창작에 몰두한다. 1994년 사망시까지 작품을 발표했다.

<메아리>

* "메아리... 이미 많이 모았어. 유리같이 날카로운 메아리도 있고, 구리 파이프 같은 것도 있고, 세 가지 소리가 나는 것도 있고, 완두콩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것도 있고, 또 ..."

"거짓말 좀 그만해!" 내가 화를 내며 말을 막았다.

* 슬픈 나날이 찾아왔다. 나는 비티카를 읽어버렸고 엄마도 나를 나무랐다. 내가 엄마에게 메아리와 관련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엄마는 나를 오랫동안 살피는 듯한 낯선 시선으로 보더니 우울하게 말했다.

" 모든 게 정말 간단해. 산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한테만 대답하는 거야.."

* 나는 그 애가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파란 팬티를 입고 좌판들과 함석 통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토마토를 고르고 고깃덩어리를 직접 저울에 털썩 올려놓고 하는 것을 보았고, 애석하게도 좋은 친구 한 명을 잃었다는 것을 느꼈다.

<백발 급구>

* 그를 위해서는 헛되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먼 여행에 대한 이런 기회는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고, 일상을 깨고 가족이라는 고삐를 늦출 수가 없어서였다. 그는 역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느꼈다. 제도된 일상이라는 마법의 굴레를 과감히 기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스크바의 개미였다. 그러나 오늘 그는 부끄러움과 죄책감 없이 광장으로나갔다.

* 딸은 그의 가출을 더 간단하게 결론 내렸다.

" 아버지가 우리를 두고 가신단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래전에 그랬어야죠." 침착하고 호의적인 대답이 뒤따랐다.

구신은 카를 브률로프가 니콜라이 대제 시대의 러시아를 영원히 등지면서, 국경에서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갔으며, 그는 조국이 되지 못하는 나라의 먼지조차도, 냄새까지도 지니고 가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래된, 그렇지만 아직은 멀쩡한 양복을 판 다음, 그는 여름 바지와 순모 와이셔츠와 샌들을 샀다.

* 세상에! 두 시간만 지나면 그는 나타샤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참금으로 레닌그라드 전체를 받게 될 것이다. 마치 나타샤가 특별히 그를 위해서 도시를 건설했으며 네바 강과 폰탄카를 지나는 다리들을 걸쳐 놓았으며.... 광장으로 향한 거리에 아치들을 세워 놓은 것처럼 그는 그런 친절한 레닌그라드를 생각했다.

<타인의 심장>

* 실험용 동물들 중에서 최초로 그는 끝까지, 아직은 자신의 먼 죽음까지, 다른 원인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살아남았고 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제가 되었다. 타인의 심장을 가진 최초의 사람이라는.

*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그가 집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초로의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이 보통 전화로 이야기할 때처럼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마치 그 애를 누가 바꿔치기한 것 같아... 나는 이해를 못하겠어. 가끔 우리에게 로봇을 돌려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 로봇은 모든 말과 모든 행동 규칙을 알고 있지만, 내부는 차가운 철이잖아. 아니, 아니 내가 괜한 투정을 하는 거지. 그 애는 한 번도 지금처럼 그렇게 주의 깊고, 자상한 적이 없어. 그런데 그 뒤에는 공허야. 그 아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고, 내 혈육을 알아보지 못하겠어..."

* "엄마"

거친 남자 목소리로 흘러나온 이상한 어린애 같은 외침을 여인은 들었다. 목소리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낯선 것이었고, 물론 이 부르는 소리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한 모든 기억들에 반응하는 그런 습관적이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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