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허송세월 / 김훈

칠부능선 2024. 6. 28. 18:38

김훈의 신간은 '늙기의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삐그덕거리는 육신을 고쳐가면서 느끼는 비애보다는 담담함으로, 정신은 여전히 쨍하다.

그럼에도 맵고 날카롭게 말하길 저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 그런 것이라는 쓸쓸한 자각까지.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차며, 허송세월로 바쁘다신다.

노인, 말년하지만 여전히 시니컬하다.

* 내가 좋아하는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날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정상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내가 치료를 받는 '목적'이라고 의사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그 말을 참았다. (19쪽)

*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슬플 때는 웃음이 나오고 기쁠 때는 눈물이 나오는데, 웃음이나 눈물이나 물량이 너무 적어서 나오는 시늉만 한다.

...

각도가 바뀌면 키스의 맛이 달라지는 모양인데, 키스의 모든 각도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각도다. 이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모든 키스는 첫 키스다. 주말이면 나는 버스정류장 앞 술집에 앉아서 이 귀대 키스의 대열을 관찰하는데, 이때 나의 정신은 뿌옇지 않다. 삶이 저토록 빛나므로, 나의 마음은 명석하다.

(40쪽)

*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157쪽)

* 대가야의 왕조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끝났다 (서기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고 열다섯 살 소년 화랑 사다함이 전투현장의 선봉장이었다.

...

화랑 사다함은 용모가 수려하고 뜻이 고결해서 많은 낭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진흥왕이 상으로 내린 가야 포로 300명을 모두 풀어주었고 왕이 주는 땅도 사양했다고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사다함은 피에 젖은 채 성불했던 모양이다. (192쪽)

* 디지털은 모든 정보와 자료를 기호로 바꿈으로써 문명의 개벽을 이루었지만, 삶과 언어의 바탕은 기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례로 무너져 간 황 씨의 생업과 그가 남긴 작업도구들은 불멸의 추억으로 인류의 근육에 각인되어 있다. 시장 상인들은 새로 날아올 제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모두 아날로그의 사업이고, 디지털의 공간 속으로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279쪽)

* 꽃 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 미세먼지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서 젗 토한 냄새를 풍겨 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318쪽)

* 나는 말에서 태어난 말을 버리고 사람과 사물에게서 얻은 말을 따라가기에 힘썼다. 나는 나의 언어가 개념에서 인공 부화된 또 다른 개념들의 이어달리기에서 벗어나서 통속을 수행하기를 바랐다.

...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했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