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이 사람을 기른 어머니 / 고경숙

칠부능선 2024. 3. 8. 19:21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여성동아>에 '이 사람을 기른 어머니' 연재한 인터뷰 글을 주제별로 묶었다.

그 훌륭한 어머니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자식들도 돌아가신 분이 많다. 각 인터뷰 말미에 그들의 그 후 소식을 전한다.

오래전, 태경이가 "할머니 소원은 뭐에요?" 하고 물었을 때, "훌륭한 사람의 어머니나 할머니" 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자녀를 잘 키우려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인구절벽시대가 된 지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고, 오늘날의 젊은세대, 신인류에게는 딴나라 이야기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출간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다시 새겨본다. 15쪽에 달하는 작가의 '책머리에' 중요한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올곧지 않고는 올바른 인성을 길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이 훌륭한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몸소 가르쳐주고 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만난 이 훌륭한 어머니들의 육성에 기대며 평균적인 어머니의 길이나마 걸어보려고 애써왔던 것 같다.' - 책머리글 중에서

* 어머니가 작고한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라면 상자 가득 담긴 '은성' 시절 외상 장부를 본 최불안 씨는 어머니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그리 많은 데 놀랐었다고 했다. 장부에는 외상준 사람의 이름 대신 '안경, 키다리, 놀부, 짱구 ... ' 등 외상객들의 특징만 쓰여 있었다. 가난뱅이 예술가들의 체면을 생각한 어머니의 필적을 보면서 아들은 다시 한 번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45쪽)

* "세상의 부모 가운데는 토마토를 기르듯이 자식을 기르는 부모와 거목을 돌보듯이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있어요. 가는 줄기를 받침대로 받쳐주고 열매를 맺게 하여 받침대 없이는 한시도 살지 못하는 토마토처럼 나약한 인생을 만드는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책임이라고 봐요. 때로는 냉정하고 무관심할 줄 알아야 사람은 맘껏 거목처럼 클 수 있어요."

58세의 나이에 정력적인 문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견 작가 이병주는 자신을 기른 어머니의 대륙적 여인상을 한마디로 쏙 들어오게 묘사해 준다. (71쪽)

* "부모는 그저 장래를 위한 터전을 마련해 주는 거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뚫고 나가도록 우리는 그저 앉아서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우리도 젊어서 부모에게 그것을 바랐어요. 우리가 이제 늙었다고 해서 젊은 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진 않아요. 어릴 때도 무엇 하나 당부하고 나무라보지 않았어요."

이 가정에서 자녀교육은 그녀의 주장대로 철두철미하게 자유방임주의다. 아무 간섭 없이 멋대로 자라게 했건만 세 딸 중 아무도 비틀어진 이 없이 곱게 성장하여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며 대견해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간섭이 없었던 것이지 남다른 지원과 조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이프오르가니스트 곽동순 어머니 이영옥> (112쪽)

* " 어머니 세대가 우리에게 해주셨던 역할을 이제 나 자신이 딸에게 베풀어야 할 차례예요. 우리 어머니 세대는 자기 몫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는 희생적인 모정의 세대였죠. 그러나 지금 세대의 딸들은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인생의 친구가 되어주는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슬플 때 달려가 함께 울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화자가 될 수 있는 엄마 말예요. 때때로 나는 엄마에게 매달려 울고 싶어지곤 했어요. 그러나 당신의 슬픔만으로도 힘겨운 엄마에게 그럴 순 없더군요. 우리 엄만 내 불행을 모르셔야 해요. .... "

가히 슈퍼우먼이라 할 조경희의 이 말에는 35년이나 생이별 속에 살아야 했던 어머니 윤이화의 쓰라린 심지가 닮은꼴처럼 새겨져 있다. (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