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잡문 / 안도현

칠부능선 2020. 10. 29. 10:21

다음에 책을 내면 '잡문'이라고 하고 싶었다. 

처음 만난 잡문집은 루쉰의 <무덤>이다. 그걸 읽고 내내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안도현의 <잡문>을 읽으니 생각이 좀 바뀐다. 

시인이 겸손한 표현으로 말했다지만 시에 못 미치는 글들이 많다. 스스로 잡문이라고 했으니 탓할 일은 아니다.

2015년 자신이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가 선거에 패했고, 검찰에 기소되고... 그 정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시는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글을 안 쓰고 살 수는 없다.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골라 <잡문>을 묶었다. 

140자 안쪽으로 써야하는 트위터의 형식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140자 안에서 촌철살인을 기대하는 것은 내 욕심이다. 

욕심을 거두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5

낙엽을 보며 배우는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 것. 떠날 때 보면 안다.

 

21

제자들이 나보다 술을 못 마시면 왜 나는 이 아이들의 시가 나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술은 사실 핑계일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겉으로 드러난 극지는 많은데 숨겨진 극지가 없는 게

안타까워 이런 생각도 해 보는 것 같다. 

 

55.

내가버려야 할 책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

책읽기의 완성은 책을 버리는 것.

 

62

달력에 아무 표시도 없는 좋은 날이 내게도 있다. 오늘이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비어 있는 날이다.

이런 날은 복 받은 날이다. 내 몸을 아무도 저리 가라 하지 않고 이리 오라 하지 않은 날이다.

마음아, 너도 징징거리지 말고 좀 쉬어라.

 

71

  장난삼아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 목이 메어

  세 걸음을 못 옮겼네.

 

이 시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가라는 걸 오늘 알았다. 백석이 참 좋아했던, 스물여섯에 요절한 일본 시인이다. 

 

146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최승자의 이 구절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대 초반이었다. 수십 차례 가을이 올 때마다

이 도발적인 언어가 고요하게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는, 개 같은 가을이다.

 

212

시가 있는 마을에서 멀리 걸어 나왔다. 그 마을로 가려면 또 멀리 걸으며 아파야 한다.

그러므로 객지 생활에 잘 적응해야 한다.

 

215

어제 과음한 덕분에 하루 종일 폐인처럼 지낸다. 책 한 줄 안 읽고, 씻지도 않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창밖을 힐끔거린다.

이것도 참 좋다.

 

244

사람은 떠나고 짐승만 남았다. 

 

 

 

                                                      너무 심플해서 모과향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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