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내 옆에 있는 사람 / 이병률

칠부능선 2020. 9. 14. 12:33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자면서도 다니는 것 같아."

그리고 살면서 매번 인정했다.

뱃멀미는 못 참지만 사람멀미는 즐긴다는 것을.

 

사람한테 다정하지만 사람한테 까칠하다.

자주 숨고 자주 간절하여 가끔 미친다.

- 이병률 앞표지글 전문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내게 물음을 던져준다. 

때론 사람에게 까칠하다고 하지만, 그의 면면은 따뜻한 사람이다.

사랑이라는 촉수가 사방을 향해 흔리는 미모사처럼 세상을 향해 흔들거린다.

그러다, 낮고 외롭고 슬픈 것들을 향해 손을 내민다. 여리고 작은 몸짓으로 그들에게 화답한다. 

여리고 서툴러서 더 어여쁜 몸짓, 그것들로 인해 세상은 이어진다. 

날 서고 굳어버린 감성을 쓰다듬어 일깨운다. 

책을 읽은 동안 

"내게도 사랑이~  내게도 사랑이~~~ " 이런 오래된 노래 가사가 둥둥 떠다녔다. 

 

 

* 평소 존경하는 번역가 김화영 선생을 상가喪家에서 뵙고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여쭈었더니 가을이라 하신다. 왜 좋으시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가을은 모두 끝나서 없어질 것 같은 분위가가 있어 좋아, 하신다.

선생님, 이 가을이 끝나기는요. 이토록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음에다 말에다 온기를 실어 세상을 짓고 허물고 하는 작업을 열실히들 하고 있는 걸요. 단풍 든 나무 아래만 서 있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구만요. 그리고 이렇게 가을에는 사람들이 거짓말인지 시詩인지 모를 말들을, 잘 모르면서도 이해하고 싶은 핑계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있는걸요. 

 

그럼에도 나는 김화영 선생의 말 "가을은 모두 끝나서 없어질 것 같은 분위가가 있어 좋아,"가 무슨 뜻인지 깊이 공감된다.

 

 

* 나에게 술은 영감을 얻게 하고 친구를 얻게 한다. 그리고 결국 그 두 가지를 얻음으로써 글을 쓰게 한다. 

영감은 어떻게 오는가 하면,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일단 술이 몸을 한 바퀴 회전할 때, 방금 낚아올린 꿈틀대는 물고기를 양손으로 쥐고 있는 느낌이 된다. 물이 잔뜩 오른 팔뚝만한 물고기라야 맞다. 뭔가를 요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이 번쩍 드는 식칼과 널따란 소나무 도마가 필요한 상태이기도 하다. 

 

무림의 '고수들의 음주비법'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제대로 한번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러다 언젠가 떡하니 식당을 내고 싶은 것도 다른 욕망 때문이 아니라 나는 유난히 누군가에게 뭔가를 먹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해서다. 그런 욕구가 있으니 어떤 사람보다도 잘 먹는 사람이 좋다.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사람하고 식사하는 일이 즐거운 것은 가득 채워지는 느낌의 양만큼 소통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려니와 그 자리에 퍼지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류에 나를 섞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몇 장 넘기면 나오는 사진도 참 따스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과 사물과 풍경에 닿은 따스한 마음, 세상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사진과 글을 만들었다. 

글을 옮겨쓰고 보니 이 책은 쪽수 표시가 없다. 감질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두께다.

맛있는 군밤으로 배를 채운듯한 기분좋은 포만감,

그렇지만 또 밥을 먹어야 하나......... .

 

 

 

아련하고 따스한 마음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작품 낭독 CD가 들어있다.

옆에서 듣던 남편의 말, 졸리운 목소리란다. ㅋㅋ

나직하고 안정감있고 좋기만 하구먼.

 

'놀자, 책이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은 글 긴 침묵 / 미셸 투르니에  (0) 2020.09.30
개 / 김훈  (0) 2020.09.20
웃음과 망각의 책 / 밀란 쿤데라  (0) 2020.09.12
소명으로서의 정치 / 막스 베버  (0) 2020.09.09
아름다운 단단함 / 오길영  (0) 2020.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