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

칠부능선 2020. 4. 17. 19:25

 

 

 

 

  서경식은 1980년대 초부터 유럽 미술관을 순례하며 책을 썼다.

  이것은 미술관 에세이의 세 번째 책이다. 한국어로 낸 첫 미술 책이라서 한국 독자들이 많이 읽어줬으면 한다.

  디아스포라로 사는 그의 관심은 전쟁화 혹은 기록화다.

  그가 그림을 보는 기준은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에 있다.

  안식년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만난 그림들은 한결같이 예쁘게 마감된 그림이라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것이 아니었으며, 현재도 우리 삶은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고, 무엇을 '미'라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친일화는 있으나 전쟁화가 거의 없는 것은 침략자에 협조을 강요당한(?) 2급 시민의 입장에서 전쟁을 경험한 탓이다.

  그의 지적이 정곡을 찌르니, 부끄러우며 씁쓸하다.

  독일의 통일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동독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얼마간의 돈을 받아서

  앞다투어 바나나를 사 먹으며 기뻐하는 모습에서, 그는 점령군에게 쵸코릿을 받고 좋아하던 패전국 시민의 모습을 떠올린다.

  독일 통일을 위한 준비기간이 20년이 넘는데도 그 괴리가 생각보다 크다. 넘의 일이 아니다.

 

  모르던 또 다른 그림 세계가 놀랍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념을 지킨 예술가들의 그림, 삶의 모습이 경이롭다. 

   

 

  * 창작을 위해 나는 낙관을 필요로 한다. 멜랑콜리는 나의 재능을 키우는 원천이 되지 못한다. 싹이 튼 꽃은 햇빛을 욕망한다.

  사람들의 어러석음에 나는 아이처럼 소리쳐 울어야 할까?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멜랑콜리, 이 말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울려, 너무나 괴롭다.  - 에밀 놀데  (51쪽)

 

  *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제외하고 전쟁의 잔혹함이라는 주제를 이렇게까지 철저히 그려낸 작품은 이전에 없었으리라.

  예술의 기적이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다. '잘 그린 그림'인가 하는 것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이 그림은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인류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

  '아름다운 그림'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총력전 시대에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한 가지 더 기적이라 생각된 것은 이 그림이 나치 시대를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110쪽)

 

  *근대 이후 오늘날 초상화 제작은 자율성 없는 예술가의 일로 여겨지지만, 이떤 화가에게는 매력이 넘치는 중요한 작없이다. ...

  개개의 인물은 특별한 색채를 띤다. 이것은 회화 전체에 작용한다. ... 개인의 본질은 그 외모에 나타난다. 외모는 내적인 것의 표현이다.

  ... 초상화가는 각각의 얼굴에 숨겨진 아름다움이나 결점을 읽어내, 그것을 회화에 표현하는 위대한 관상학자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것은 문학적인 생각이다. 화가는 '판단'하지 않고 '직시'한다. 나의 모토는 '너의 눈을 믿어라!' 라는 것이다. - 오토 딕스  (157쪽)

 

  * 이승만 정권 때에는 피카소 크레용이라는 상품명을 쓴 회사가 반공법으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피카소는 <조선에서의 학살>을 그린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권력은 이런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예술에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은 피카소의 원작을 본 적이 없는 시절부터 피카소가 그린 <조선에서의 학살>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곤 했던 것이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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