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몰락하는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박영자 여사는 변변찮은 한 사내의 곁을 서른세 해 동안 홀로 지켜주었다. 그 사랑의 지구력만큼 나를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책을 좋아하고 작가를 존경하는 분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나의 행운이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 먹으면서 이 글들을
썼다. 어머니가 쓰신 책이므로,
어머니에게 드린다. "
- 책머리말 중에서
서두부터 그는 서늘하면서 아름다운 심성을 드러낸다. 비평가의 안목이 깊고 따사롭다. 나도 두 인간의 어머니로서 뜨거움이 밀려온다.
작품들을 해석하며 깨우치려 하지 않고 함께 울고, 미소짓게 한다. '그는 젊고 성실하고 유능한 비평가' 라는 권혁웅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책 보다 나중에 나온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 타자의 고통
그는 똥과 오줌으로 상징되는 육체의 타자성을 어떤 경우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한다.
.... 첫 단편 <화장>은 이 질문에 대한 전력투구의 응답이다. 김훈은 늙은 아내의 죽음과 젊은 부하직원 추은주의 출산에 대해 말한다. 그 말은
차갑도록 객관적인데, 실상 이 소설의 시선은 기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기자의 윤리는 팩트와 육하원칙에 근거하는 데 있다. 인간의 팩트는
몸이고 그 몸의 육하원칙은 생로병사 일 것이다. (49쪽)
* 슬픔과 아픔
'슬픔'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던 이가 이번에는 '아픔'을 진단하기 위해 병원에 간다. '슬픔'이 '아픔'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경계로
윤동주는 비로소 습작기의 어설픔과 작별한다. 그래서 <병원>은 무엇보다 윤동주 자신에게 각별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작으로서의 <병원> .... 수전 손택이 지적한 대로 결핵이라는 질병은 낭만적인 내포를 거느리는 일종의 은유다. (더럽고 번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된 암과 달리) 결핵은 깨끗하고 고독한 병이다. (507쪽)
* 소녀는 스피노자를 읽는다
..... 김애란을 사랑하라' 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젠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이를테면 그녀가 '명랑'하기 때문이다.밝을 明에 밝을 朗이다. 상처가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사람은
언제 이지러지는가. 나의 외부에서 무언가가 나를 찌를 때다. 그 '외부' 란 타인의 세계이고, 그 '무언가'란 어떤 말, 어떤 시선, 어떤 행위들이다.
(694쪽)
* 울음 없이 젖은 눈
- 김소진에 대해 말하지 않기
... 1997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삶이 때때로 창피했던 당시의 나는 노래패에서민중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창피하지 않기 위해 불렀지만
부르면서 더 창피했다. .... 서울대 불문학과의 최권행 선생께서 우리 청맹과니들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때 어떤 전화 통화직후 선생께서는
자리를 뜨겠노라 양해를 구하셨다. 소설가 김소진이 영면했다는 것이었다. 캄캄한 표정으로 떠나는 선생께 나는 심상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경거망동을 계속하였다. 아마도 그날이 4월 23일 밤이었던가 싶다.
그가 작고한 날에야 그의 이름을 내 속에 새겨넣었다. (716쪽)
며늘이 선물한 책받침대, 침대에서 옆으로 누워 읽을 때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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