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기행>을 함께하며 알게 된 고경숙 선생님이 첫 소설집을 보내주셨다.
11편의 단편인데 거의 자전소설이다.
참혹했던 시간을 잘 살아낸 기록으로 막연하게 짐작했던 사건들을 자세히 알게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천국>, <푸른 배낭을 맨 남자> <5박 6일>, 단숨에 세 편을 읽고,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80년 5월, 지식인들의 수난이 현장감 있게 펼쳐진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데 목숨을 걸겠다는 남편을 내조하고, 노모와 자식을 돌보는 가장이 되어 모진 세월을 건너왔다.
숨을 몰아쉬고... tv를 기웃거리고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서성거리다 나머지 작품을 읽었다.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문제를 헤쳐보이는 <별들의 감옥>, <새가 된 아이>, <두 번째 실수> 슬픔의 공감능력을 이끌어 낸다.
전 세대의 투쟁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민주주의, 그럼에도 빨갱이타령이 끝나지 않은 오늘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과거가 오늘을 이룬 밑거름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밀고 나아갈 힘을 준다.
역시 내공이 깊다. 책을 덮고도 여운이 묵직하다.
오래 전 여행을 함께 하면서 느낀 건, 임헌영 선생님이 그 많은 일을 잘 할 수 있는 건 내조를 200% 받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제 남은 생을 오직 글쓰기에 바치겠다는 고경숙 소설가의 다짐에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40대에 문단에 발을 얹은 후 문학지에 발표했던 작품들 중 10편과 미발표작 1편을 첫 소설집으로 묶었다.
작년 여름 남편의 44년 만의 무죄판결을 내 귀로 듣고 법정을 나오면서 비로소 나도 이제 내 몫을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당자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유죄의 그늘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 질긴 수난은 내 반생의 영혼 속에 굵은 대못처럼 박혀서 아픈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대못들은 단순히 내 표피를 짓물러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고, 30대 이후의 내 뼈와 근육 일부로 육화되어 나를 지탱했던 원심력이면서 내 문학에 드리운 암영이기도 했기에 함부로 들추
기가 주저되곤 했다. 피붙이들도 지인들도 차라리 몰라주기를 바랐던 나의 치기였을지도 모르고, 우리를 핍박한 이들을 아직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참혹하고 부당한 굴레를 단 한번뿐인 인생 막바지에서 겨우 벗을 수 있었던 게
생각할수록 원통하다.
기울어진 마당을 대책 없이 함게 달려오면서도 우리에겐 읽기와 쓰기의 희열이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그 가혹한 시절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고꾸라지지 않고 쉬임 없이 읽고 쓰면서 팔순을 바라보는 지점에 그와 나란히 도착한 것이 기쁠 뿐이다.
아직도 험악하기 그지없는 세상이라 남은 시간도 바라는 그림대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의심스럽지만 호출되지 않는 이 평온을 우선
다행스러워하며, 이젠 나도 얼마 남지 않은 사는 날들을 오직 쓰기에 바치고 싶다.
-2020년 1월 고경숙 - '소설가의 말'
표지 그림은 고명숙 화가, 인도여행을 함께한 고경숙 소설가의 동생이다.
어눌한 작은 새가 당신 같아서 좋다고 하지만... 고 선생님은 절대 어눌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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