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은유 너머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2. 9. 13:41

  <수필가가 감동한 이 한 편의 수필>

 

                                                              은유 너머

                                                         노정숙                                                                                       


 

암병동의 사랑법  

   윤혜란

 

  그 여자가 울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우리는 둘 다 항암제를 맞고 종합병원의 긴 복도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어지럼증과 구토증에 눈은 쾡하고 얼굴은

하얗게 바랬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가깝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죽는 거는 겁 안나···. 누구든 죽는 거 아니야? 그러나 항암제는 무서워서 맞기 싫어···.”

   울었던 것 같다. 나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죽는 것 겁난다. 사는 것도 겁난다. 항암제도 겁난다. 모든 게 다 겁난다.

   암에 걸린 후 절망의 순간순간에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살아온 것이 많았다. ‘나는 괜찮아라며 엎어지고 넘어진 다음 자기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을 겁내야 한다. 병원 소독약 냄새가 훅 들어온다. 더 매슥거린다. 복도가 점점 조용해지고 우리는 나갔다.

   바깥세상은 밝고 활기차며 우리와 무관하게 잘 돌아간다. 하늘은 푸르고 차들도 씽씽 잘 달리고 사람들은 바쁘게 오간다. 그녀와도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도중 갑자기 앞이 노랗고 다리 힘이 확 풀렸다. 길가 남의 집 담벼락에 털썩 기대어 앉았다. 눕고 싶다, 조용히 눈감고 싶다. 독약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구나. 우리 집 화장실은 푸세 식이라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얀 구더기가 기어기어 올라온다. 항암제 맞은 날, 내가 화장실 두어 번 갔다 오면 구더기들은 하얗게 죽어 떠있다. 독약의 효과다. 쓰러지듯 눕는다. 편안하다, 내가 지푸라기 같다. 누군가 힐긋힐긋 쳐다본다. 부끄럽지 않다. 쳐다봐요. 나는 아직 살아있어요. 눈가가 축축해진다. 나도 기어코 우는구나. 그랬던 것 같다.

   유방은 여성의 신체 중 민감한 곳이다. 암수술 후 처음 담당선생님으로부터 촉진을 받기 위해선 진찰실 들어가기 전 미리 웃옷을 벗어야 했다. 벗은 옷으로 가슴을 감싸며 계면쩍게 들어서는데 의사선생님의 호통소리가 벼락 치듯 했다.

   빨리 손 치워욧!”

   앞의 할머니가 굽신굽신하며 옷을 내렸다 올렸다하고 있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얼른 옷을 내렸다. 눈 둘 데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연민으로 입이 썼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자존심과 정서는 사치다.

   촉진을 마친 우리는 침대가 두 줄로 기다랗게 놓인 주사실로 갔다. 항암제를 넣은 링거를 주렁주렁 달은 환자들이 누워 있는 그곳의 풍경은 마치 우주인의 알집 같았다. 모두 데친 배추처럼 흐늘흐늘했다. 어떤 할머니가 소리를 내질렀다.

   어 응, 부끄러운 게 당연하제. 손을 빨리 안 내린다고 소리를 질럿! 에이! 초파리 X같은 놈!!”

   우하하.”

   모두가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 항암제 링거가 하나도 무섭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다른 과에서 온 어린 환자들도 멋모르고 피식 웃었다. 인생만사 다 나쁜 건 아니다. 아주 가끔은 듣기 좋은 욕도 있는 법이다.

   그녀와는 각별하게 병을 나누었다. 자석치료집에서, 침집에서, 개고기집에서 항암 치료중인 우린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아무리 아파도 우리는 엄마였다. 병은 병이고 할 일은 할 일이었다. 나는 항암치료로 헉헉 힘들어도 딸이 대학 다니는 서울 자취집에서 밥을 해 먹이고 싶었고, 캄캄한 밤 공터로 고3 아들을 불러내어 눈물로 호소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 기억조차 안 나지만, 그 순간은 모두가 절실했었다. 이웃집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된장찌개 냄새에 엄마가 생각 나 계단에 앉아 눈물 흘리며 핏줄을 그리워했다. 사랑과 생의 의지를 주는 것도 가족이고 상처를 주는 것도 가족이었다.

   그녀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북의 산 오름길 꼭대기에 있는 그녀의 오두막 - 황토를 발라 수리한 고가 에서 그녀는 푸르른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윤선생, 저 산과 들판이 전부 내 정원이야, ,,, 우리 오늘을 즐깁시다. 어제 죽은 사람이 그리워하던 오늘이잖아.”

   어느 날, 나는 침을 맞으려고 남편이 모는 차를 타고 각북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산 아래 그녀의 정원인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던 우리 부부는 갈지자로 비틀대는 승용차를 보았다. 차는 한쪽은 절벽이고 한쪽은 산 쪽 수로인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이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이 운전하는 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험하다 싶어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차는 수로에 처박혔다. 절벽에 떨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녀의 충격은 컸다.

   내가 죽어야 끝이 나겠네, 남편 죽이겠어.”

   그녀의 중얼거림은 낮고 조용했지만 여운이 길었다.

   그녀의 병은 재발했고 그녀는 절망했다. 어느 날 밤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12시쯤이었다.

   윤선생, 나 많이 아파.”

   다음날 달려간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거나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갔다.

   그녀 말고도 많은 사람이 떠났다. 중학생 아들을 두고 공장에 다니던 이혼녀는 항암비용이 없었다. 자식 걱정, 돈 걱정으로 더 아팠던 그녀도 소식이 없어졌다. 췌장암 말기에 포도요법을 한다던 동서도 자식 고생시킨다며 걱정을 하다가 세상을 등졌다. 병동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던 여인도 얼마 후부터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딸, 우리의 어머니들은 풀잎 같이 연약하지만 사랑에는 강했다. 사랑 때문에 아팠고 사랑 때문에 병을 견디었고 사랑 때문에 생을 놓아 버리기도 했다. 그녀들이 놓아버리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고, 놓아버릴 수 없는 것은 가족이었다.

   오늘도 누군가의 엄마가, 아내가, 딸이 사랑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러지 말기를, 오늘을 즐기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이란 어제 가버린 사람에겐 얼마나 절실한 시간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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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병동의 사랑법은 느닷없이 닥친 청천벽력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본다. 병이 온 것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살아온 결과라고 여기며 이 땅의 누군가의 엄마와, 아내와, 딸에게 사랑 때문에 자신을 버리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고 간절히 당부한다. ‘그녀들이 놓아버린 것이 자신의 생명이고 놓아버릴 수 없는 것이 가족이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다.

   서구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질병이 정념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나타는 것으로 아름다움과 창조성을 가져온다고 했다.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질병과 병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질병은 일종의 심판이며 심지어는 환자의 성격에 어울리는 병이 온다고도 했다. 암은 가장 파괴적인 사회현상이나 흉포한 에너지를 지닌 그 무엇을 지칭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병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나 형벌이 아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난데없는 벼락이다. 예고 없이 맞아야 하는 죽음으로는 심장병이 더 가혹한데, 유독 암 진단을 받으면 선고라는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방사선이나 화학요법, 독한 치료 과정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때의 공포는 그동안의 삶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의도적 기교가 없는 건 문학이 아니라고도 하지만, 이 거친 강을 건너온 사람은 그 삶 자체가 문학이다. 진솔한 투병기록은 은유를 뛰어넘는다. 모든 글이 상처와 결핍을 거름으로 완성되지 않는가. 작가는 그 시간을 풀어놓음으로써 자기치료가 되고, 독자는 고통도 힘이 된다는 걸 공감하게 된다. 피투성이 상처가 꾸덕꾸덕 말라 더께 지고 딱지가 떨어지는 과정이 절절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안에 잠재 상태로 있던 눈물과 슬픔, 절망을 들춰보게도 한다.

   인간은 모두 시한부인 삶이지만 남아있는 시간을 알 수 없는 건 행운이다. 병은 복불복이나 운명의 장난질일 수 있다. 막연히 다가오는 불안한 감정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순명하리라 생각했다. 누군가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걸리면 그것도 어떤 뜻이 있어 생겨난 일이라 여겼다.

   오랜 이웃인 P씨는 청상의 시어머니를 지극하게 모셨다. 격의 없는 모습에 친정어머니인 줄 알았다. 타인에 대해 배려가 깊고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기선수인 그가 휠체어생활자가 된 것을 보고 나는 낙망했다. 걸어서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는데 척추 손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병증을 수긍할 수가 없다. 신심 깊은 그는 아직도 묵주를 손에 들고 있다. 뜻이 무엇일까.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 너머 절대의 힘에 몽매로 의지할 때가 좋았다.

   다양한 환경 요인과 함께 페스트를 중세의 도덕적 타락과 연결하고 결핵이 불결함과 연관 있다고 했듯이 현대에는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 때문에 암이 발생한다고 한다. 무자비한 악의 은유로서 암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의 힘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의학의 발달로 그 신비로운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주변에 암환자가 여럿이 있다. 몇은 암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졌고, 몇은 지금도 암을 거느리고 조심조심 살고 있다. 몇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들이 겪었을 불안과 참담한 시간을 마주한다. 삶은 견뎌낸 사람의 몫이다. 고통과 절망을 건너온 것만으로 그 삶은 빛나 마땅하다.

   암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라고 하니 병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본다. ‘슬픔과 불안이 유방암을 가져오는 가장 흔한 병인病因이라는 애슬리 쿠퍼의 주장과 연결된다.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분출해야만 하는 어떤 기질이 존재한다고 한다. 풀지 못한 감정의 폭발이 병으로 온다는 것이다. 홀로 열중할 일이 없거나, 염치와 배려심 많은 사람이 암에 취약하다는 말인가 보다.

   시대는 변했는데 가정에서 여자의 셀프 충성은 여전히 과잉이다. 가족은 누구도 그녀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딸이며 아내이며 어머니인 그녀가 즐거워야 가족도 건강하고 행복하다. 지금 나는 나의 기쁨을 일깨우려 한다. 나의 소중한 그들을 위하여.

   이제, 암은 확률이 적은 벼락이 아니라 누구나 언제든 맞을 수 있는 폭풍이 되었다. 암병동의 사랑법이 한 편의 수필은 막연히 두려웠던 암을 우리 삶에 바짝 당겨 들여놓고 바라보게 한다. 가슴이 저릿해 오는 아픔과 다짐마저 기꺼워 숨을 몰아쉰다. 별 감동 없는 오늘이 애틋해진다.

 

  <수필과비평>2020년 2월 통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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