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어미의 바람

칠부능선 2019. 12. 29. 12:14

 

어미의 바람  

                                                                                                                                                                               노정숙

 

오랜만에 해운대 해변을 걸었다. 번쩍이는 빌딩들이 호위하고 있는 풍광이 이국에 온 듯하다. 신발을 벗고 싸늘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먼 곳을 바라본다. 해변 가운데쯤 모래밭에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분홍스웨터를 입은 깡마른 할머니가 바다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는 염주를 들고, 앞에 시루떡 다섯 덩이와 사탕 봉지가 놓여있다. 백팔 배, 아니 천 배를 하는지 굽은 등을 펴지 못하고 연신 절을 한다. 말을 걸고 싶었는데 절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무슨 소망이 저리 깊을까. 하기는 답을 듣지 않아도 어미라는 종족의 이심전심이 전해온다. 보다 큰 소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식의 행복을 비는 것이라고 짐작하며 나는 내가 젊은 엄마이던 시간을 돌아본다.

다 큰 딸이 어느 날 제 다리에 있는 상처의 흔적들을 보면서 엄마는 저를 공주처럼 키우지 않고 막 키웠다고 한다. 공주가 뭐 좋니, 씩씩하게 맘껏 뛰어노는 게 좋지. 그러고 보니 딸에게 인형이나 샬랄라한 드레스를 사 준 기억이 없다. 심플하며 편한 옷만 입혔다. 오빠 것을 물려 입히기도 했으니 돌아보니 미안하다. 또 대학생이 된 아들이 저는 아이를 낳으면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하겠다며, 내 방목형 자율교육을 비난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아들이 피아노 레슨을 끝까지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한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남들 다니는 온갖 학원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고는 싫다고 하면 무엇이건 바로 끊었다. 그 중에 피아노와 미술학원은 가장 빠른 시간에 끝을 봤다. 공부 역시 채근한 적이 없다. 내가 한 건 글을 깨우칠 즈음에 시를 적어 집안 곳곳에 붙여두고 함께 읽고 외우게 한 일이다. 강요는 아니고 내가 시범을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공부도 놀이처럼 하길 바랐다. 아들딸이 고3이 되어도 주변 사람들이 내가 고3 엄마인 걸 몰랐다. 공부해야 하는 건 고3이지 엄마가 아니라고, 엄마가 지키고 있어도 할 놈은 하고 잘 놈은 잔다는 아들의 말이 나를 더 뻔뻔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도 긴 여행을 했으니 말이다. 엄마도 한 인간으로 열심히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소원은 뭐예요. 훌륭한 사람의 엄마가 되는 거. 바로 대답을 하고 보니 뜨끔하다. 이렇게 헐렁하게 키운 아들딸에게 무슨 욕심인가. 무엇이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내 기준의 훌륭한 사람이 맞기는 하다.

생전의 시어머니께서 가끔 너는 왜 그리 욕심이 없니?”라며 책망하셨다.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능력보다 욕망이 크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어도, 돈이 많지 않아도 복잡한 관계에 얽혀있어도 굴하지 않고 미미한 자존감을 북돋우며 살아왔다. 일찍이 아큐식 정신승리법을 새겨, 수용할 수 없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은 흘려버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뇌 속의 요동이다.

30년간 행복에 대해서 연구한 서은국 교수는 행복이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가 인간의 뇌라고 한다. 이 악기가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야 행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뇌는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잘 하는 뇌라고 한다. 원래 뇌의 용도가 연애하고 친구와 사귀는 것이지 이차방정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는 대목에서 웃으며 끄덕였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바라는 게 복권 당첨이라지만 미국에서 100억 원 이상 상금을 받은 복권당첨자들의 1년 뒤 행복감을 조사한 결과는 주변 이웃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행복은 그렇게 한 방에 오는 게 아니고, 가족이 환하게 웃을 때나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글을 만났을 때나 멋진 풍광 속에 있을 때처럼 소소하게 자주 느끼는 즐거움에서 온다. 행복은 기쁨의 크기가 아니라 횟수에 있다는 것이다. 행복이 객관적인 조건들에 좌우되지 않으며 경제력과 비례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행복한 삶 안에 가치가 있다. 기쁜 일을 맞았을 때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힘이 되는 건 사람이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쾌감마저도 혼자라면 공허하다. 타인의 슬픔과 기쁨에 공감하는 능력이 행복의 바탕이 된다.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해 돈을 쓰는 건, 그 안에 함께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안에서 화평하면 혼자 있어도 그득하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얼마나 모진가. 아버지는 조건부의 사랑을 하고, 어머니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준다. 생명을 공유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신도 어머니의 기도는 들어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달라고 달라고만 기도하고 신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일어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오래 전에 기도는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들은 걸 구실 삼아 기도에 등한한 나는 또 얼마나 가소로운가. 주시는 대로 감사히 받겠노라고 가슴으로만 말한다. 사랑은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염치없이 애먼 뇌만 괴롭힌다.

모든 어미의 바람은 자식의 행복이다. 더불어 자식의 바람도 부모의 행복일 게다. 서늘한 해변에서 자꾸자꾸 절을 하는 어머니가 어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시길. 어서 자리를 털고 이웃과 함께 사탕과 시루떡을 나누며 이야기에 빠지시길 빈다. 어딘가에서 그의 자식도 어머니의 평안을 바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산문> 202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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