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2020 <The 수필> /선정평

칠부능선 2020. 2. 26. 00:05

2020 <The 수필> 선정평- 노정숙

 

 

 

 보라가 좋아졌다

권현옥

 

보라, 어려서는 가까이 하지 않았던 색이 좋아지는 과정을 전한다. 갈등과 불안, 우울을 품어 무거웠으나 연륜을 더하면서 경건함과 위엄을 갖춘 색으로 다가온다. 보라의 내면에서 관습 타파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바라보고 방황과 우울, 퇴폐성마저 좋아하게 된다. 범접할 수 없었던 것을 감당하게 된 것은 내공의 축적이다. 몽환의 기미가 다분함에도 작가의 감성편력에 빠져든다. 색으로 말하는 거침없는 사유가 매력이다.

 

 

    

 

    

 

지막리 고인돌

조후미

 

동네 아낙들이 이불 빨래를 널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널찍한 돌, 밭을 늘리기 위해 파서 던져버린 돌들, 그것이 선사시대 유물인 선돌과 고인돌이었다. “순하기만 했제 앙긋도 모르는 사람들인께라. 대대로 가난했던 지막리 사람들한테 뭣이 제일로 중혔것소. 문화재고 뭣이고 새끼들 입에다 풀칠해 주는 것이 우선이제." 척박했던 시대를 살아내며, 문화유산을 간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진도 사투리로 전하니 절절하고도 비통하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육 탁

김희자

 

물질도 정신도 모두 바닥을 칠 때 진통제 역할을 해준 것이 문장文章이었으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글쓰기가 살기 위한 도구였다고 한다. 작가의 자세가 참하고 장하다. 글을 쓰는 것은 다루려는 소재에 대한 몰두이며 저항이다. 오래 궁굴린 소재는 사상이 되고 형태를 갖추며 문제를 드러낸다. 문제에 대한 성찰과 영감이 신념이 되어 스스로를 어루만지며 달랜다. 온 몸으로 친 바닥, 바닥을 하늘로 바꾸는 글의 힘이 미덥다.

 

 

 

    

 

 

테이크아웃

최장순        

 

유목의 본능이 살아났다. 안에서만 먹던 음식을 밖으로 들고나간다. 음식뿐 아니라 일터와 놀이공간도 쉽게 이동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디지털 시대에 발맞춘 변화다. TV와 캠코더, 음악, 영상 모두를 넣어 들고 다니는 휴대폰은 외부장기가 되었다. 안에서만 누리던 삶이 밖으로 나가며 변화무쌍해졌다. 손익과 장단을 따질 겨를도 없이 거대한 흐름을 타고 있다. 테이크아웃은 내 자리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글 쓰는 자세와 작법을 증편 만드는 방법과 함께 풀어냈다. 발효와 숙성을 거쳐 떡시루에 김이 오르기까지의 정성이 오롯이 담겼다. 집에서 떡을 빚지 않는 시대에 이 과정을 전하는 것만도 의미가 있다. 체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언어들이 야물다. 지식이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증명한다. 글이 생물임을 아는 작가는 부단히 들썩이며, 갈고 닦아 탄탄한 생을 엮는다. 바라보는 마음도 오달지다.

 

 

    

 

 

 

마음 한구석

추선희

 

모임에서 마주 앉은 이의 붉게 물드는 눈시울을 알아채며 동류의식을 느낀다. ‘언제든 넘칠 준비가 된 눈물샘을 지닌 엄마라는 종족이다. 아픈 아이를 둔 엄마의 모습이 담담해서 더 애틋하다. 몸을 움직여 공간을 윤나게 닦다 보면 공간과 물건이 청결해지며 마음도 차분해진다. 붉어진 눈시울이 쉬이 넘치지 않는 건 부단히 마음을 매만지고 닦은 공력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간명한 글에 여운이 길다. 마음 구석을 잘 살필 일이다.

 

 

    

 

 

붉은 바다, 사하라

강표성

 

모래사막에서 바람이 그려놓은 바다를 본다. 끊임없는 목마름을 견뎌야 하는 삶은 갈증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속울음을 토해내고 싶었는데 뜻밖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모래는 작아서 자유롭다. 각을 버리고 몸피를 줄이고 줄여 둥글게 바람에 파도친다. 일몰을 바라보며 자연과 사람이 오롯이 소통하는 시간을 만난다. ‘주어진 것들의 따듯한 배경이 되라는 바다 닮은 마음을 얻었으리라. 작가의 내밀한 성찰이 미덥다.

 

 

 

    

 

    

대화의 진화

김인채

 

혼령들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신참인 호킹이 자신의 업적이 사랑과 우정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장자가 정신적인 욕구만을 앞세워 일구어낸 빚으로 만든 빛이라 한다. 다윈은 그가 남긴 업적보다 유전자를 이어갈 2세를 셋이나 둔 것이 값진 성공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말은 감질나고, 공자의 진화는 놀랍다. 이들의 다음 대화가 기대된다. 상상력을 끌어온 새로운 작법이 신선하다.

 

    

 

 

산을 넘다

김채영

 

삶은 산을 넘는 일이다. 산 너머에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생은 첩첩산중, 산 너머 산이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먼 산을 바라보며 도시를 동경하던 젊은 어머니가 산 너머로 떠났다. 높은 산은 골이 깊다. 그 산이 다행히 마을에 닿아있다. 고통을 벼리어 단단해진 사유로 절박했던 가슴앓이를 담담하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이 믿음직스럽다.

 

 

 

    

 

 

 수각水閣과 돌확

장금식

 

수각의 물이 흘러 돌확에 담긴다. 맑은 물을 품은 돌확은 산사 주변의 조형물과 어울려 아름답다. 환자인 시아버지를 2년 동안 혼자 감당하며 겪은 어려움을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단번에 해결하지만, 그동안 돌확에 채운 물을 한순간에 다 빼버린 듯 면구스러워 한다. 시아버지를 향한 측은지심이 애틋하다. 수각과 돌확에 생의 흐름을 얹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숫돌을 읽다

허정진

 

잠시 거주할 시골 마을 빈집을 둘러보며 수돗가에서 숫돌을 마주한다. 숫돌은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을 견뎌 내며 모든 날 있는 것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제 몸을 허물고 비워 볼품없게 변한 숫돌에서 석향石香을 읽어낸다. 빛나게 산화하는 숫돌의 생애는 평생을 여백으로만 살아낸 아버지의 모습이다. 탄탄한 필력에 담박한 글맛이 살아있다.

 

 

 

 

 

 기생충, 찔레꽃을 불러오다

송혜영

 

영화 <기생충>의 많은 메타포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대만카스테라로 망한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내리막 계단에서 불러온 찔레꽃,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남정네의 속뜻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다. 시간의 근력은 바닥이던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기생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걸으며 비운 것을 읽으며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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