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애도 준비 + 평 (허상문)

칠부능선 2019. 10. 10. 19:47

   <중편 에세이>

애도 준비

 

노정숙

 

 

 

 

  ‘내 마음은 편안하다.’

  철학자 김진영이 66세로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한 말이다. 그가 평생을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이 시험대에 올랐다. 정신력이 무너지는 육신을 보듬고 병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정신적인 것의 역할을 증명해야 한다. 작가는 이렇듯 육체와 정신을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도 한다.

  유전자병을 앓는 그는 과학은 유전자를 바꾸지 못하지만 정신이 유전자를 바꾼다고 생각했다. 웃음, 유머, 명랑성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일 그것은 자긍심이다. 그에게는 유전자병을 짐짓 내려다보는 즐거운 정신이 있다.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고 시작한 병원 생활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쓴 13개월의 기록을 읽었다. 환자의 독자성으로 비로소 발견된 사랑과 감사에 대한 기억과 성찰, 무연히 흐르는 마음결이 잔잔하다.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 -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떠올렸다. 지성과 통찰로 무장한 철학자답게 부정과 분노는 선선히 녹이고, 타협의 과정으로 넘어간다. 도도하고 까칠함이 매력이던 그는 바로 착해졌다. 투병이란 말은 옳지 않다며 손님처럼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사랑이 그렇듯 병과도 잘 이별하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러나 지금 이 사이의 시간,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주어진 시간에 지나온 생의 진실함과 아름다움에 사랑을 느낀다.

  몇 해 전에 김진영은 롤랑 바르트의『애도 일기』를 번역했다.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였던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처절한 상실의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 슬픔은 바르트 자신의 삶을 놓아버릴 지경에 이른다. ‘바르트가 잃은 건 사랑이고 내가 잃은 건 건강이다. 그는 완전히 잃은 것이고, 나는 아직 중요한 것이지만 소량을 잃었고,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바르트에게 동병상련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내가 느끼는 자기 연민은 치졸하고 가엾다.’ 타협의 시기에 이른 날선 통찰이다. 이 마음 밝은 철학자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닌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애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죽음처럼 치명적이지 않지만 죽음보다 더 지독한 상태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일임을 알았으니까.

그는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남을 위해 쓰면서 어느 때보다 귀한 마음이 된다. 『아침의 피아노』는 죽음을 슬픔과 상실로 보지 않고 기쁨과 감사,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절절한 시간의 기록이다.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되기 충분하다. 롤랑 바르트가 이런 사적인 글은 문학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의심 없이 문학으로 들어온다.

  슬픔에는 경이로운 치유의 힘이 있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 푹 빠져 잠겨있다 보면 편안한 것으로 다가온다. 여린 몸에 포근한 카디건을 걸치고 창가에 앉아 바흐의 음악을 듣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가 말하던 품위와 우아함이 풍긴다.

책 마지막 장에서 멈칫, 짧은 문장 사이 긴 여백을 바라보며 침묵에 빠진다. 책을 덮지 못하고 나는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간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말은『고맙습니다』다. 향년 82세에 맞는 죽음은 한결 너그럽다. 신경생리학자인 그는 2014년 12월에 암 판정을 받고 종양을 제거하고 치료받으면서 암세포가 전이되어 다음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색스는 여든 살이 되면서 쇠퇴의 징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반응이 느려지고, 이름들이 자주 가물가물하고,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날마다 1마일씩 수영을 즐기고 사랑과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인간은 저마다 독특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죽음을 맞는다.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을 알게 되면 자신의 삶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객관화할 수 있나 보다. 풍경을 바라보는 듯 초탈한 마음으로 우정을 더욱 다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았고, 조금쯤은 돌려줄 수 있었던 삶에 감사한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재를 즐겼던 시간에 감사한다.

  ‘비스무트는 83번 원소다. 나는 살아서 83번째 생일을 맞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주변에 온통 ‘83’이 널려 있는 것이 어쩐지 희망차게 느껴진다. 어쩐지 격려가 된다. 게다가 나는 금속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눈길 주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인 수수한 회색 금속 비스무트를 각별히 좋아한다. 의사로서 잘못된 취급을 받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환자들에게 마음이 가는 내 성격은 무기물의 세계에까지 진출하여,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비스무트에게 마음이 가고 마는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과학도면서 이런 마음결이기에 문학을 했나 보다. 신경학자로서 무한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 세상을 향한 통찰에 위트를 더한다. 뉴런, 기호, 신경회로 등 지루한 동네이야기도 쉽게 풀어서 쓴다. 그래서 나처럼 과학지식이 없어도 유작인 『의식의 강』에 빠져들어 철벙거릴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병을 앓은 주인공들이 혼란과 고통을 해학과 유머로 넘어서고 있다. 그는 병상에서 갑작스러운 수면발작을 겪으면서도 자서전의 교정쇄를 수정했다. 문장 중간에서 잠이 들어 책상에 머리를 쿵, 들이받으면서도 손에 연필을 놓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산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라는 올리버 색스의 말에 안도한다. 그가 83번째 생일을 맞지 못했어도 크게 애달프지 않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던 교향곡이 빠름-느림-빠름으로 급하게 숨을 몰아쉰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연속이다. 하나 모든 죽음은 애통하다.

 

 

  성숙한 노년을 맞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파커 J. 파머는 여든 살에 다가서며 온전함에 이르는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이 되면 중심을 비켜주고 가장자리에 나앉아야 하며,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른으로서 공공선을 위해 더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남은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활용한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마음의 상처가 부서져 조각난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린 세계로 향할 수 있다며 새로운 힘을 북돋는다. 슬픔이 모두 고통이 되는 건 아니다. 고통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무언가로 변형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매일 삶의 고통과 기쁨을 넘나들면서 마음을 운동시켜 감정에 탄탄한 근육을 만든다. 육체의 근육 못지않게 중요한 게 강단 있는 마음이다.

  자기애와 외로움을 다스리는 걸 노년의 의무로 삼는다. 노화라는 중력과 맞서 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얼굴과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것을 오래 산 사람의 상징이라며 사랑스럽게 여긴다.

 

 

  인간의 통찰은 연륜에 비례하지 않는다. 다 자란 사람이 어른이고, 다만 늙은 사람이 노인이다. ‘늙으면 아이 된다’는 말에 비의가 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아이가 시기하는 것을 보고, 연약한 아이의 몸에는 죄가 없지만 그 영혼은 이기적이며 악하다고 했다. 아이는 배려와 이타를 알지 못한다. 어른은 경험에서 얻은 성찰로 배려와 이타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수명이 길어졌어도 온전한 어른으로 사는 시간이 긴 것은 아니다.

  잘 살아내면 잘 죽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말년에 몸을 못 쓰게 된 아버님을 보면서 내 믿음이 깨졌다. 어른은 한순간에 아이가 되기도 한다. 몸과 정신의 분리 현상을 느끼며 혼란에 빠졌다. 황당하고 난감한 일을 당했을 때 내 대처능력이라는 게 어린애 수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어른에 이르지 못하고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절감했다.

  사람의 본성이 무엇일까.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성질이 아닐까. 체면과 교양으로 무장했던 것이 허물어지며 이기심과 폭력이 나오기도 하고, 인의와 예지가 굳건하게 지켜지기도 한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치매에도 착한 치매와 고약한 치매가 있다. 우리를 황당하게 하는 건 그 양태를 살아온 모습에서 유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부정과 분노, 우울을 무한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타협과 수용에 이르는 시간이 길수록 지치고 쇠약해진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써놓고, 나는 ‘인간의 본성은 약하다’로 읽는다. 그러나 남의 불행한 행동을 보고 따라서 하지 않을 만큼은 영악하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저세상을 위한 보속이라 믿으며 위로를 받는 것도 좋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조상의 경제력으로 정하는 ‘금수저론’이 있지만, 건강한 신체와 굳건한 정신력을 물려받는 게 참된 금수저다. 인간은 55세까지 유전자에 의해 건강이 유지되고 그 후는 그동안의 식습관과 생활방식에 의해 축적된 것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시댁과 친정 모두 건강 유전자를 받았으니 정신력이 좀 떨어져도 크게 억울할 건 없다.

  영원히 살 것같이 살고 있는 시간은 축복이다. 실상 내가 두려운 건 죽음보다 병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병원에 가는 일은 국민건강 보험료를 내는 국민의 의무와 권리만큼 시늉만 한다. 내 무심 병은 첨단 의학의 세례보다 운명에 기댄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달라고 써두었다. 일찍이 시신기증서도 받아두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마지막 처리에 내 뜻을 전해 두는 것으로 가벼워졌다.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자연스러운 죽음을 거부한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코에 줄을 끼고, 소변 줄을 단다. 누군들 존엄하게 죽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단번에 이별하는 건 행운이다. 목숨은 질기고도 허망하다.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그물다리가 출렁거린다. 그 다리를 어떻게 건너보내든 남은 자의 가슴엔 회한과 아쉬움이 남는다.

  예전에는 마당에서 기르던 개가 병이 들면 슬그머니 산으로 들어가 홀로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개만큼도 자존심을 지키며 죽기가 어렵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으로 직립보행의 권위를 지켜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까. 많이 부린 몸에게 미안하다. 전생에 무수리였는지 나는 몸 부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정신의 호사를 위해 먼 나라 험한 곳도 거침없이 내달려 물과 산과 흙에 뒹굴기도 했다. 몸 부리기와 마음 받들기는 팽팽하다. 지금까지 다행히 어느 한쪽이 피폐해지기 전에 잘도 넘나들었다.

  삶이 공평하지 않듯, 죽음도 공평하지 않다. 100세 시대가 이미 왔고, 앞으로 120세를 바라보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걸. 개인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노쇠 앞에서 무력하다. 노화라는 중력은 예고 없이 안개처럼 몸 전체에 스며들어 난감한 기척을 한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나서 섭생과 운동을 새롭게 다짐하지만, 이미 늙은 몸은 시간의 연장을 미미하게 허락할 뿐이다. 오로지 통증을 어르고 달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 감질나는 시간을 위해 얼마나 비굴해질지 벌써 애달프다.

  어쨌거나 나는 중병을 선고받으면 산으로 들어가려 한다. 슬슬 삐거덕거리긴 해도 아직 멀쩡한 부분이 더 많은 몸이기에 하는 방자한 생각임을 왜 모르겠는가. 아이들은 각자 가정을 이뤘고, 부모님도 내 손을 떠났다. 남편도 어설프긴 해도 독립적이 되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에 내가 아니면 안 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이 서글픈 각성이 다행이다.

  누구는 부양의무에서 벗어나면 공공선을 위해 용감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 내 손톱 아픈 게 더 중하다고 하지만, 무게중심이 오락가락하는 나는 이제 내 몸 하나 폐 끼치지 않고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김진영이나 올리버 색스는 떠났어도 우리 기억 속에서 살아 있다. 언제든 펼쳐 읽으며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으니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재에도 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을 담은 애틋한 마음으로 유고집까지 챙겨보았으니 말이다.

다음 세대까지 남을 명문을 못 쓴다고 해도 절망할 일은 아니다. 나도 이 아름다운 행성에 생각하는 동물로 태어나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풀어내며 살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다.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명료한가? 아름다운가?’ 파머가 쓴 모든 글을 아내 샤론 파머는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한단다. 이 잣대에 나도 내 글을 비춰본다. 어찌 가치 있는 말만 하겠는가, 명료하고 아름답기까지. 게다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서라니…. 아무래도 언감생심이다. 겨우겨우 쓰는 내 깜냥에 맡긴다. 머리보다 먼저 나가는 발로, 뛰는 가슴으로 때론 눈물로 칭얼대는 손목을 달래고 침침한 눈을 혹사하며 쓰고 지우고 또 쓴다.

  연습도 못 해본 삶을 이 정도 살아낸 것도 대견하다. 모두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 덕분이다. 죽음 앞에서도 어른다웠던 그들과 죽어감 앞에서도 어른으로 살고 있는 아름다운 분들을 받들어 모신다. 죽음과 죽어감 사이, 아직은 아무 일 없는 지금, 나는 이 시시한 하루하루를 환대한다.

  남은 자의 편안을 위한 애도 준비는 빠르고 꼼꼼할수록 좋다.

 

 

<수필과비평> 2019. 10월호 통권 216

 

 

 

 

 

 

이달의 문제작

 

안티고네의 윤리, 문학의 윤리

허상문

 

 

들어가며 : 윤리 상실 시대의 윤리

.....

 

노정숙의 <애도 준비>

 

  사람에게는 삶의 윤리가 중요한 만큼 죽음의 윤리도 중요하다. 삶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원리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은 처음부터 개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현실 속에 나타나는 무엇이다. 문학적으로 삶과 죽음음 언어의 객관화 작용 저 너머에 존재한다. 삶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복합적 세계라면 그와 함게 공존하는 죽음 또한 현실 너머에 존재하면서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와 양자의 의미를 동시에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이런 문학적 인식은 더 나아가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탐사케 하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삶과 죽음의 어쩔 수 없는 제약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은 문학을 통해서 열린다.

  <애도 준비>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루고 있는 중편 수필이다. 이 수필을 통하여 작가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애도 준비를 강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에게 슬픔은 언제 어떻게 오는 것인가.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였던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처절한 상실의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 슬픔은 바르트 자신의 삶을 놓아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슬픔에는 경이로운 치유의 힘이 있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 푹 빠져 잠겨있다 보면 편안한 것으로 다가온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 자신에 어울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풍경을 바라보는 듯 초탈한 마음으로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애도 준비>에서 예시하듯이 바르트가 바라본 어머니의 죽음이 그렇고, 신경생리학자인 올리버 색스와 파커 J. 파머가 바라본 죽음이 그렇다. 아무리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연속이다고 하지만 모든 죽음은 애통하다. 죽음이 무엇인가. 이 지상에서의 모든 것과 이별하고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죽음에 무슨 심오하고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죽음이 그렇듯 늙음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고 성숙한 노년의 삶 운운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의미에서 한없이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더욱 나은 세상을 위해서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열린 세계로 향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슬픔이 반드시 고통인 것만은 아니며 때론 생명을 가져다주는 무언가로 변형될 수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간의 통찰은 연륜에 비례하지 않는다. 다 자란 사람이 어른이고, 다만 늙는 사람이 노인이다.

   ‘늙으면 아이 된다.’는 말에 비의가 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아이가 시기하는 것을 보고, 연약한 아이의 몸에는 죄가 없지만 그 영혼은 이기적이며 

  악하다고 했다. 아이는 배려와 이타를 알지 못한다. 어른은 경험에서 얻은 성찰로 배려와 이타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수명이 길어졌어도 온전한

  어른으로 사는 시간이 긴 것은 아니다. 잘 살아내면 잘 죽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말년에 몸을 못 쓰게 된 아버님을 보면서 내 믿음이 깨졌다

  어른은 한순간에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더 많은 사람은 자연 질서와 같은 생명의 질서를 거부한다. 모두가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거부한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코에 줄을 끼고, 소변 줄을 달면서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엄하게 죽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단번에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목숨은 질기도고 허망하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출렁거리는 그물 다리를 어떻게 지나거나 남은 자의 가슴엔 회한과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이 이른바 생명의 윤리이다.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인 이해가 과학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 복제와 줄기세포 연구를 통하여 인간이 타고난 생명을 유전학적으로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생명의 윤리는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변형시키고 연장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달리 생각하면 유전자 변형을 인간에게 접목하는 것은 인류에게 큰 혜택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생물학이나 의학의 발전에 따라 생명을 어디까지 물질로 취급해야 좋은가, 생사 의 경계를 어디에 두는가는 여전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여기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따져 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생명은 모든 존재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모든 권리란 생명을 전제로 생겨난다. 생명을 하나의 권리로 파악한다면, 생명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고 어떤 이유로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애도 준비>에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거의 절대적 기본권으로 여기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말대로 영원히 살듯이 살고 있는 시간은 축복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보다 병드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화자는 첨단 의학의 세례보다 삶의 운명에 더 기대고자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고 써두고 시신기증서도 받아두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운명에 대한 마지막 준비를 해두자는 것이다.

 

  연습도 못 해본 삶을 이 정도 살아낸 것도 대견하다. 모두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 덕분이다. 죽음 앞에서도 어른다웠던 그들과 죽어감 앞에서도 어른으로

  살고 있는 아름다운 분들을 받들어 모신다.

  죽음과 죽어감 사이, 아직은 아무 일 없는 지금, 나는 이 시시한 하루하루를 환대한다. 남은 자의 편안을 위한 애도 준비는 빠르고 꼼꼼할수록 좋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인간의 삶은 무엇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애도 준비>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모색한다. 신이 내린 비극적인 운명과 이를 거부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바로 삶의 과정이 아닐까. 결국 모든 인간이 지향하는 영원불멸의 생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슬픔도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을 동안에 죽음에 대한 애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애도 준비>는 일러준다.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윤리적 인식은 작가의 창조적 문학정신에 의해서 새롭게 인식된다.

.....

 

<수필과비평> 2019. 11. 통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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