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쓴 책 몇 권을 읽고 나니 '판사'가 영감님이 아닌 가까이 있는 다정한, (그는 시니컬한 개인주의자라고 했지만) 사람으로 다가온다.
내 가까이에는 아들의 어릴적 여자친구가 처음 '판사'가 되었고, 지금은 조카 며느리가 '판사'다. 젊은 워킹맘인데 둘 다 이쁘고 상냥하다.
판사가 더 이상 멀리에 있는 '영감님'이 아니다.
<판사유감>은 개정증보판이다.
"판사의 일이라는 것이 응급실 의사처럼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맺힌 하소연을 매일 들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심장이 얼어붙은
냉혈한이라도 외면할 수 없는 비극이 있고, 아무리 지독한 에고이스트도 무관심할 수 없는 부조리가 있습니다.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세상 어느 누구라도 울컥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사연들을 가끔이라도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 판사유감은 이런 사연들을 전한다.
"많은 분들이 글 내용 자체보다도 단지 '판사'가 쓴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과하게 고마워하시고, 감동하신다."
맞다. 그 고마움을 아는 것이 또 우리는 고마워서 그의 책을 자꾸 읽는가 보다.
<쾌락독서>
2018년 12월 1쇄를 찍고 9개월만에 6쇄를 찍었다. 그의 말대로 치밀한 책은 아니다. 어릴때부터의 독서와 음악 편력이 펼쳐진다.
소년 시절, 좋아하는 책과 음악만 쌓아놓고 홀로 섬에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의 활자중독이었다. 많이 읽은 사람은 쉽게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기질이 있는 듯하다. 이 판사는 아마도 말보다 글쓰는 게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스 함무라비> 는 책에 이어 티비 드라마의 대본까지 직접 쓴 걸 보면 말이다. 어려서 부터 쟝르 불문, 종횡무진 다독한 결과겠지.
그가 읽은 많은 책 중에 내가 읽은 것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를 소개하는 글이다.
'이 책의 제목은 과거형이다. 그렇다. 김영갑은 그 섬에 있었다. 기적같은 아름다운 제주 중산간 들녘에 있었다.
여명이 다가오는 풍만한 오름을 홀로 오르고 있었다. 연인도 혈육도 떨치고 사진기 하나에만 목숨을 걸고 있었다. ....'
나는 오래 전, 두모악에서 목숨이 꺼져가는 김영갑을 만났었다. 안타깝던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다 내 취향의 글을 발견할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 다른 책들은 억지로 꾸역꾸역 입에 쑤셔넣는 느낌이라면,
문체가 내 취향인 책은 잘 만든 메밀국수 면발이 호로록 넘어가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그 재미 때문에 서점 들르기를 멈출 수가 없다.
*'좋은 글을 쓰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 다음 여행을 꿈꾸고 있으면 지금 일상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좀더 관대해진다. 여행자가 굳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으니까. 여행자답게
가능하면 좀더 친절한 사람이 되려 애쓸 뿐이다. ...
여행이 삶에 자유를 준다고 흔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그 자유조차 스스로 금세 자진반납하게
만들곤 한다. 다 욕심 때문이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에서 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김형석 교수의 '부지런함'과 '거리두기'를 전한다. 처외조부라고 한다.
어느날 딸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고 하셨단다. 좀 서늘하다.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까지 책과 함께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걸 읽으며 나는 <책과 함께 할 수 있을때까지만 살기>를 소망한다.
문유석 판사는 참으로 글을 편안하고 쉽게 쓴다. 힘 빼고 능청부리며 쓴 글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그것들과 닮았다.
책을 가지고 노는 재미에 푹 빠진 행복한 사람이다. 그의 '책수다'에 푹 빠진 나도 잠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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