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토황소 격문 / 최치원

칠부능선 2014. 1. 10. 15:43

                      토황소討黃巢 격문檄文

                                                                                                     지은이: 최치원     옮긴이: 손광성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아무개는 황소에게 고한다.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정도正道라고 하는 것이오.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 아는 것을 권도權道라 한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치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인생 백년을 살더라도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으나. 만사는 마음이 주장하는 것이므로 옳고 그른 것은 충분히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황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나 다만 정벌이 있을 뿐 싸움은 없는 것이나, 군정은 은덕을 앞세우고 베어 죽이는 것을 뒤로 하는 것이니, 앞으로 천자의 서울을 회복하고 큰 신의를 펴고자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명을 받아서 간사한 꾀를 부수려 한다.

  네가 본래 먼 시골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서울을 어지럽히고 드디어 음흉한 마음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혀 이미 그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아, 요순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족이나 호족 따위가 복종하지 않았으니, 양심이 없는 무리와 불의 · 불충한 너 같은 무리가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는가. 먼 옛날에 유요와 왕돈이 진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운 시대에는 안록산과 주자가 우리 황실을 개 짖듯 우습게 여겼다. 그들은 오히려 모두 손에 강성한 병권을 잡았거나, 또는 중요한 지위에 있어 호령만 떨어지면 수많은 사람이 우레와 번개가 달리듯 하고, 시끄럽게 부르면 아부하는 무리들이 안개나 연기처럼 몰려들어서 길이 막힐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더러운 종자들이 섬멸되고 말았다. 햇빛이 활짝 펴지면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는가? 하늘의 그물이 높이 드리워져서 반드시 흉한 족속들을 없애고 마는 것이다.

  하물며 너는 천한 몸으로 태어나 농사꾼으로 일어나서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꾀라 하며, 살상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짓고, 속죄될 만한 어진 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드러내놓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아울러 지하의 귀신도 이미 몰래 너를 죽이려고 의논할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 숨이 붙어 있으나, 벌써 정신이 없어지고 넋이 빠졌으리라.

  사람의 일 가운데서 자신을 아는 것이 제일이다. 내가 헛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모름지기 살펴 들어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덕이 깊어 더러운 것도 참아 주고, 은혜가 중하여 잘못을 따지지 않고 너를 절도사로 임명하고 지방 병권을 주었다.

  그렇거늘 너는 오히려 짐새의 독을 품고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않아,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에게 분수 모르고 짖어대듯이 했고, 나중에는 몸이 임금의 덕화를 등지고 군사가 궁궐에까지 몰려들어, 제후들은 위태로운 길로 달아나고 임금은 먼 지방으로 파천하게 되었다. 너는 일찍 덕의德義에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고 다만 모질고 흉악한 짓만 더해갔다. 결국 황제께서 너에게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반드시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하늘이 무섭지 않겠는가.

  하물며 주나라 솥을 옮기는 것에 대해 물어볼 것이 아니니라. 한나라 궁궐이 어찌 너 같은 자가 머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마침내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소나기는 하루 동안을 채우지 못한다’ 했으니, 천지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또 듣지 못했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너는 간사한 것을 감추고 사나운 것을 숨겨 악이 쌓여서 온갖 재앙이 가득한데도 위험한 것을 스스로 편하게 여기고 미혹하여 뉘우칠 줄 모르는구나.

옛말에 이른바 제비가 장막 위에다 집을 지어놓고 불이 장막을 태우는데도 방자히 날아드는 것이나, 물고기가 솥 속에서 희희낙락하다가 바로 삶겨지고 마는 것과 같은 꼴이다.

  나는 웅장한 군사적 계략을 가지고 여러 군대를 모았으니, 날랜 장수는 구름같이 날아들고 용맹스런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고 큰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군함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 도태위는 적을 부수는 데 날래었고, 수나라 양소는 엄숙함이 신이라 일컬어졌다.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리에 횡행했다. 맹렬한 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으니 태산을 높이 들어 참새 알을 눌러 깨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서늘한 바람이 이는 가을에 물귀신이 우리 군사를 맞이한다. 서풍이 불어 말라 죽이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이슬은 답답한 기운을 상쾌하게 해준다. 파도도 일지 않고 도로도 잘 뚫려, 석두성에서 닻줄을 푸니 손권이 뒤에서 호위하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장선다.

  서울을 수복하는 것은 열흘이나 한 달 정도면 틀림없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상제의 깊으신 인자함이요,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려는 것은 큰 조정의 어진 제도다.

  나라의 도적을 정복하는 이는 사사로운 분합을 생각지 않는 것이요, 어두운 길에 헤매는 자를 일깨우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을 해 주어야 한다. 나의 한 장 격문으로 너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융통성 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기회를 잘 알아서 스스로 계책을 세워 허물을 짓다가도 고칠 줄 알아야 한다. 말일 그렇게 한다면, 땅을 때어 나라를 열어 대대로 부를 계승하게 하고 몸과 머리가 두 동강 나는 것을 면하게 해 줄 것이며, 높은 공명을 얻게 할 것이다.

  서로 겨우 낯만 익힌 정도 밖에 안 되는 도당의 말을 믿지 말고 영화로움을 후손에까지 전하도록 할 것이다. 이는 실로 대장부의 일이다. 아녀자가 알 바가 아니니 그들이 말린다고 해서 그 말을 좇아서는 안 된다. 미리 무리에게 보고하여 공연한 의심을 살 필요가 없느니라.

  나의 명령은 천자를 받들고 믿음은 강물에 맹세하여 반드시 말이 떨어지면 그대로 응하는 것이요, 원망만 깊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 날뛰는 도당에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여전히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그때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군사로 한 번 휘둘러 멸망시킬 것이다. 오합지졸의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져 몸은 도끼에 기름 바르게 될 것이요, 뼈는 전차 밑에 가루가 되며, 처자도 잡혀 죽으려니와 종족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동탁의 배를 불로 태울 때처럼 너를 불사르는 지경에 이르러서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잘된 일인가 못된 일인가 잘 판단하라. 배반하여 멸망하기보다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바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 장사의 결단력을 택하여 표범의 무늬처럼 현저하게 개과천선할 것을 결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으로 우유부단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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