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최인호 씨를 보내며 / 임철순

칠부능선 2013. 9. 27. 09:39

최인호 씨를 보내며

 

2013.09.27


임철순

 

 

작가 최인호 씨를 알게 된 건 1995년이니 지금부터 18년 전입니다. 당시 나는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고, 그는 한국일보에 <사랑의 기쁨>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집필을 맡긴 경위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대단했습니다. 장편과 대작에 오래 몰두해온 그가 모처럼 작심하고 쓴 연애소설은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 사이에서 만나는 실내악처럼 편안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작가 최인호의 빛나는 가편(佳篇)이라고 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는 타고르 <기탄잘리>의 시가 곧잘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집을 갖춰두고 그가 원고를 보내오면 대조해가며 확인했습니다. 언젠가 회사로 찾아온 그는 내 책상 밑에 있는 시집을 발견하고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랑의 기쁨>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습니다. 연재 100회가 됐을 때 나는 문학평론가이면서 정신분석의 권위자인 조두영 서울대 교수(76ㆍ현재 명예교수)에게 주인공 여성과 그 딸의 심리 분석을 토대로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는 글을 위촉했습니다. 그분의 분석과 예측은 독자들은 물론 작가인 최인호 씨도 놀랄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글에 문학작품과 정신분석의 논리적 상관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연재소설을 담당하는 부장과 작가로서 만난 이후, 그와 나는 제법 자주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키도 작은 사람이 시가를 피우면서 밝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고, 언제나 유쾌한 개구쟁이 청년 같아서 만나는 게 즐거웠습니다. 문단의 어떤 단체에도 기웃거리지 않는 자유로운 전업작가인 점도 존경스러웠습니다. 골프도 몇 번 함께 쳤습니다. 문인들 중에는 골프를 타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즐겼습니다.

최인호 씨는 1963년 서울고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지자 당선이 아닌 가작으로 처리했으니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그는 그보다 4년 후 군 입대 중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정식 작가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을 텐데도 한국일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1973년 한국일보 자매지인 일간스포츠에 <바보들의 행진>을 연재했고, <사랑의 기쁨>을 마무리한 2년 뒤에는 다시 <상도>를 연재했습니다. 1974년에는  ‘이제 낡은 시대는 가고 청년들의 시대가 온다’는 내용의 시론을 한국일보에 보냈습니다. 한국일보는 이 글에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야심만만한 제목’(최인호 씨의 표현)을 달았습니다. 살벌하고 숨 막히는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최인호에 열광했습니다.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상징되는 새롭고 젊은 대항문화는 아직도 ‘청년문화’라는 말로 건재합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1998년, 두 번째 문화부장을 하고 있던 나는 최씨에게 금강산에 다녀와 관광기를 쓰게 했습니다. 모든 신문이 유명 문인들에게 의뢰해  ‘금강산 참관기’를 실어 마치 갑작스럽게 백일장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나온 글 중에서도 최씨의 글은 단연 발군이었습니다. 금강산에 빗대어 그의 글이 바로 모든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굳센 금강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습니다.

너무 특정 신문만 이야기해 미안하지만 최인호 씨는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언론계 사람들과 함께 앉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에게는 아직 예전의 낭만이 남아 있다.’ 낭만은 젊음이고, 젊음은 곧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와 만났을 때 ‘좋은 신문을 망쳐먹은 경영주들’을 비판하며 분개하던 것도 그런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2008년 침샘 암에 걸려 투병을 하면서부터는 자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1~2년 전 당뇨 때문에 매일 열심히 걷던 그를 청계산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오히려 내 건강을 걱정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는 항암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2011년 불과 두 달 만에 1,200장이 넘는 전작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그 작품을 읽으며 참 마음이 아리고 아팠습니다.

그 해에 두 달 먼저 발매된 내 에세이집 <노래도 늙는구나>를 보내면서 건강을 물었더니  ‘임철순 놈이 아닌 님에게’ 그 소설을 답례로 보내며 생각보다 상태가 좋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하도 악필이어서 나에게 책을 줄 때마다  ‘임철순 놈에게’라고 써주었다고 에세이집에 비꼰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응수로  ‘놈이 아닌 님’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나 성취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환자가 아니라 작가로 죽겠다던 그가 좀 더 살아서 더 좋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최씨는 불교적 가톨릭신자로서 독실하면서도 자유로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엔 유교의 정신세계를 깊이 천착해온 바 있으니 예수에 대한 소설이나 거대 종교를 두루 망라한 대작을 잉태하고 있었을 텐데 작품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올해로 등단 50년, 최인호 씨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그 자신이 글을 쓴 게 아니라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쓴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가족들에게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고 말했다는데, 하늘나라에서도 조금만 쉰 뒤에 주님이 불러주는 글을 끊임없이 쓰기 바랍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청소년 잡지 <학원>에 ‘휴식’이라는 시를 투고해 우수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괴테의 시 문구/'산봉우리마다 휴식이 있으리라'처럼/ 나는 휴식을 취하였노라/…/ 결코 나는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나는 잠을 자지 않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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