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어떻게 쓸 것인가 / 루쉰

칠부능선 2014. 2. 19. 00:26

 

   어떻게 쓸 것인가

    - 루쉰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다. 어떻게 쓸 것인가 역시 문제다.

 올해는 그다지 많이 쓰지 않았는데 특히 <망원>에 기고한 것이 적었다. 그 이유를 내 자신은 분명 알고 있다. 말하려니까 아주 우스워지지만,

이유는 바로 너무 좋은 종이때문이다. 때때로 잡감을 끄적거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무슨 대단한 의미도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새하얀 종이를 먹칠해 버리고 싶지 않아 바로 힘이 빠져 그만 두게 된다.

흡족할 도리가 없다. 내 머리속은 이처럼 황량하고 천박하고 공허하다.

물론 말할 거리들은 우주에서 시작하여 사회 국가까지, 고상한 문명, 문예는 대단히 많다. 고래로부터 숱한 사람들이 말했고 앞으로도 무수한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를 말하지 않으련다. 아마 작년 샤먼도에서 숨어 있을 때라고 기억되는데,

남들 미움을 톡톡히 산 덕인지 결국은 '귀신을 떠받들되 멀리하라'는 식의 도서관원이나 제본공, 열람생들이 있지만 밤 아홉 시가 지나면 별처럼 모두 흩어져 사라지니

거대한 서양식 건물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된다. 나는 정적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정적은 술처럼 진해져 가벼운 취기를 느끼게 한다.

뒤켠 창으로 바라보이는 군데군데 뼈가 드러나 보이는 산의 숱한 흰 점은 무덤의 무리다.

외따로 구슬 알갱이 같은 심황색의 불빛은 난푸튀사의 유리등이다.

앞쪽, 바다와 하늘은 하나가 되고 검은 솜덩이 같은 밤의 빛이 가슴속으로 몰려 엄습하는 것 같다.

나는 돌 난간에 기대어 멀리 둘러보면서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사방의 헤아릴 수 없는 비애와 고뇌, 영락과 사멸 모두가 이 정적 속으로 섞여 들어오고,

그걸 약주로 바꾸어 빛깔과 맛과 향을 더해 본다. 그때, 나는 쓰려고 했으나 쓸 수 없었다. 쓸 도리가 없었다. 이것도 바로 내가 말하는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차오름을 느낀다. 입으로 열려 하면 순간 공허를 느낀다"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 고뇌'가 아니가 하고 때때로 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담담한 애수지만 그 속에는 얼마쯤의 유쾌함도 지니고 있다. 난 그것이 가까이 가려 했지만, 그렇게 하려고 할 수록

아득해져 대부분은 그저 나 홀로만이 돌 난간에 기대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신히 이 수고로움을 잊어버릴 때가 되면 또 담담한

애수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끝의 대부분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다. 다리가 바늘 같은 것에 콕 찔리면 손바닥으로 아무 생각 없이 따끔한 곳을 바로 내리쳐 버리고는 순간

모기놈이 나를 물고있구나 할 뿐이다. 무슨 애수니 밤의 빛니니 하는 따위들은 모두 구천으로 까마득하게 날아가벼려, 기대고 있었던 돌 난간 마저도 더 이상

마음속에 있지 않게 된다. 게다가 이건 이제서야 그렇다는 것이고, 그때는 말이지 회상해 보면 돌 난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방으로 즉시 걸어들어 가서는 하나뿐인 안락의자 - 완전히 쭉 드러눕지 않는 긴 등나무 의자 - 위에서 모기에 물린 상처를 어루만졌고,

따끔한 것은 간지러움으로 바뀌어 점점 부어올라 조그만 혹이 되었다.

나도 어루만지다 긁고, 꼬집고 하는데, 간지럽던 게 통증으로 바뀌면 어느 정도 참고 견딜만 하게 된다.

그 다음은 더욱 고상하지 않게 된다. 늘 전등불 아래 앉아서 유자를 먹는 것이다.

비록 모기놈에 한 번 물린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제 몸에 일어난 일리란 결국 절실한 법이다. 안 쓸 수 있다면 물론 더욱 즐겁겠지만 쓰지 않을 수 없다면

내 생각에는 이런 작은 일만을 쓸 수 있을 뿐, 그러나 그 날 몸이 느낀 선명함과 절절함처럼 결코 쓸 수가 없다. 하물며 천 번, 만 번 물리고, 게다가 칼이든지

창이든지 하면 그것은 쓸 수 없는 것이다.

니체는 피로 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피로 쓴 글이란 게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글은 결국은 먹으로 쓰는 것일 뿐, 피로 쓴 것은 오히려 혈흔에 불과 하다. 물론 그것은 글보다도 더욱 더 마음을, 혼을 움직이고, 더욱 더 직접적이며 분명한

것일 테지만, 그라나 쉽게 빛이 바래고 쉽게 지워진다. 이점은 바로 문학을 빙자해서 재능을 뽐내려는 것인데, 흡사 무덤 속 백골이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그 장구함으로 소녀의 뺨에 어린 발그레한 홍조를 깔보는 것 같다.

안 쓸 수 있다면 더욱 상쾌해서 살 것 같겠지만, 그러나 쓰지 않으 수 없다면 내 생각에는 편한대로 써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무튼 이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니, 설령 혈흔보다 더 영원히 생생할 것이라 해도 그저 문인이 행운아요 영재임을 증명해

줄뿐이다. 그러나 진짜 피로 쓴 글은 당연히 예외이다.

작자의 생각은 대충 이렇다. 무릇 문학인의 작품이란 결국 다소 자서전의 색채를 띠는 것이라서 3인칭을 써내도 종종 실수로 1인칭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3인칭 주인공의 심리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그리면 독자는 타인의 심리를 작자가 어떻게 그렇게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한다. 그리하여

이런 종류의 환멸감은 문학의 진실성르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산문 작품에서 가장 편리한 체재는 일기체이고 그 다음이 서간체라는 것이다.

실로 이것은 토론해 볼 만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체재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윗 글의 첫 번째 결점은 독자의 세심하지 못함에 있다.

하지만 작품이란 것이 대체로 작자가 타인을 빌어 자기를 서술하거나, 아니면 자기를 가지고 타인을 추축하는 것임을 안다면 환멸을 느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설령 때때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여전히 진실은 진실이다. 그 진실은 3인칭을 사용했을 때나 1인칭을 잘못 사용했을 때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자가 체재에 집착하여 허점이 없기만을 바란다면, 그건 신문 기사나 보는 것이 마땅할 터, 문예에 대해 환멸을 느껴도 싸다.

그러나 그 환멸도 그렇게 애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 그건 진짜 환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대관원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홍루몽'에 불만을 품는 것과 같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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