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글밥 / 김은주

칠부능선 2015. 1. 5. 09:31

.....중략....

내게 글 쓰는 일도 밥 먹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보다는 한 가지 사물 안에 철저히 녹아들어 그 바닥을 긁는 편이다. 그리고 바닥의 맛을 오래 음미한다. 오래 소재를 묵히다 보면 그곳에서 슬슬 단맛이 차올라오고 향기로운 냄새도 난다. 가끔은 내가 탄수화물 중독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만큼 밥을 좋아하지만, 밥을 먹지 않아 생기는 허기는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하지만, 글을 못 써서 생기는 허기는 내게 치명적이다. 뭔가를 잡고 몰입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데 일에 쫓겨 막막히 시간을 보내 버릴 때 그 시간이 아까워 나는 심한 허기를 느낀다.
이 허기는 결코 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먹는 일과는 무관하게 밀려오는 헛헛함은 사람을 더 견딜 수 없게 한다. 가끔은 몸부림을 치다가 일생 나에게 주어진 글 밥의 양은 얼마일까?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평생 밥을 먹고 살면서도 얼마만큼의 밥을 먹는지 알 수 없듯이 나의 글밥의 양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만 내게 다가온 글밥을 먹고 다시 원고로 생산해 내는 일 밖에, 그 이상의 일은 나 자신도 알 길이 없다.
내가 소재를 잡고 그 소재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다시 곱씹는 행위를 하며 글 안에서 달달하게 차올라오는 단내를 맡는 순간은 밥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포만감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짧은 쾌감에 나는 이미 중독된 것이 분명하다.
글이고 밥이고 번잡함에서 멀어 질수록 내게는 고요가 찾아든다. 월요일 새벽 5시, 근 십 년째 읽어오는 경전을 읽는다. 소리 내어 읽다가 보면 내 목소리가 다시 내 귀에 들리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치아가 부딪혀 내는 소리, 그 진동이 뇌를 울린다. 매주 읽는 경인데도 어느 날은 이 구절이 여기 있었나 싶게 생경한 느낌으로 내게 와 닿는 날도 있고 물 흐르듯이 지나가 버리는 일도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뇌가 글 읽는 파동에 흔들리다 보면 저절로 맑은 각성상태가 된다.
귀 뒤에서부터 맑게 차올라오는 기운이 있을 때 백팔 배를 한다. 몸의 마디마디를 다 움직이다 보면 모든 결이 하나둘 풀리고 막혔던 기가 소통된다. 호흡이 가빠지고 등에는 약간의 땀이 배어난다. 몸의 모든 맥이 열렸을 때 조용히 앉아 명상에 든다.
절을 하며 일어섰던 몸의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다 보면 지난 주 바쁘게 만났던 얼굴들이 떠내려가고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줄을 선다. 명상의 들머리에서 생기는 일이다, 다시 나를 잡고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하나둘 멀어지며 블랙홀처럼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고요 안에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빛이 보이고 천리 밖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지척에서 들린다.
이 아득함의 끝에서면 감은 내 눈앞에 밥 한 그릇 둥둥 떠다닌다. 쳐다보니 내 몫의 글밥이다. 화려하게 치장한 글밥이 아니라 단조롭게 장아찌 하나만 둔 조촐한 밥상이다. 여럿이 모여 소란스럽지도 않고 단지 나 혼자다. 혼자여서 더 자유롭다. 수저를 들고 막 그 밥상 앞에 앉는다. 문장 하나를 입 속에 넣고 오래 씹어 본다. 씹을수록 단맛이 입안에 가득 고여 온다. 감칠맛 나는 이 맛을 나는 오래 즐긴다. 감은 눈으로 내다본 창밖 저 너머에 오월의 장미가 붉다.

 

 - 김은주의 <글밥> 중에서

'산문 - 필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문학소고 / 김광섭  (0) 2015.02.20
어머니의 다섯 글자 / 최민자  (0) 2015.02.17
어떻게 쓸 것인가 / 루쉰  (0) 2014.02.19
토황소 격문 / 최치원  (0) 2014.01.10
최인호 씨를 보내며 / 임철순  (0) 2013.09.27